길상사 관음상과 예수는 없다-조우석
글쓴이 : 묘안심     첨부파일 :       날짜 : 02-06-17    조회 : 2366
<지난 신문 스크랩을 정리하던중
우리 함께 읽어볼만한 기사라는 생각에..>


어디 한 곳 명쾌한 것 없이 답답한 우리 사회이지만, 이 시대의 명장면으로 꼽기에 유감없는 것 하나를 차분히 음미해보자. 서울 성북동 길상사가 문제의 현장이다.

2000년 4월 그곳에 봉안된 관음보살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관용(寬容)의 정신 내지 어른스러운 문화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선명한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명동성당의 '예수상' 등을 만든 가톨릭 신자인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가 뜻밖에 관음상 한 점을 제작했고, 이 불상을 법정 스님 등 눈밝은 분들이 척하니 알아보고 법당 안에 모신 이례적인 사건이 전개됐던 것이다.

전통적인 관음상의 도상(圖像)에 충실하면서도 모더니티까지 갖춰, 국내 불교미술사를 통틀어서도 이채로운 장면인 이 관음상이 봉안되기까지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최교수는 오랫동안 보살상을 만들려는 속마음을 키워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주쟁이가 만든 관음을 받아줄 절이 있을까' 싶어 전전긍긍해왔다.

그에게 사진작가 강운구가 귀띔을 했다. '법정스님이라면 혹시…' 해서 두분 사이에 다리를 놓은 메신저가 작년 1월 타계한 동화작가 정채봉이었다.

법정스님이 서울 연남동의 최교수 작업장을 방문하는 오고감과 의기투합 끝에 '길상사 관음상' 이라는 명장면이 연출됐다. 이만해도 마음 흐뭇하지만, 후일담은 또 있다.

최교수는 봉안 직후 고수(高手)다운 말을 던졌다. '불교의 견성(見性)이나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라는 게 근본에서는 같은 얘기다. 또 솔직한 고백이지만 내 신앙은 가톨릭이지만, 예술의 원천은 불교에 가깝다. ' 앞서의 멋진 장면은 이 정도의 내공 속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거꾸로만 진행돼 왔다. 불교는 불교대로 풍부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해왔고, 전래 2백년이 넘는 기독교 역시 퇴행에 다름없는 배타주의 풍토 속에 갇혀왔다.

이 지루한 상황에 시원한 돌파구를 뚫어준 사건이 지난주에 내보낸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오강남 교수의 신간 『예수는 없다』(현암사)였다.

얼핏보면 불경(不敬)스러움이 따로 없지만, 알고 보면 우리 사회가 기다려온 성숙한 메시지라고 언급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행복한 책읽기' 에서 처음으로 단행본 한권에 한면 전체를 할애하는 파격 편집을 한 것도 사안의 비중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책 한권이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이자 그 자체가 브랜드이기도 한데, 매번 어슷비슷한 산술적인 대접을 할 수는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어쨌거나 고백하지만, 나는 그 기사를 준비하면서 몰매를 맞을 각오를 했다.

괜한 소영웅주의가 아니라, 필요한 논의는 한번 해보자는 판단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적지 않은 메일이나 전화를 받았지만, 예견했던 거친 항의는 거의 없었다. 출판사에 걸려오는 전화 역시 유사했다고 들었다. 항의 못지 않게 격려가 더 많고, 주로 신자들을 중심으로 반응이 좋아 벌써 3쇄를 찍었다고 한다.

이번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부문에 단박에 5위로 오른 점도 사회적 반향을 짐작케 한다. 기독교계가 이제는 '교계의 내부고발자' 인 오교수의 시선에 공감을 한다는 얘기일까?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듯 변할 수도 있다는데 내기를 걸고 싶은 마음이다.

조우석 중앙일보 출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