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독성탱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11-04-29    조회 : 2372

   우리는 사찰에 가면 중심 전각인 대웅전大雄殿, 비로전毘盧殿 등과 떨어져 서있는 응진전應眞殿, 조사전祖師殿, 독성각獨聖閣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전각에 들어가면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진 나한탱羅漢幀, 독성탱獨聖幀, 고승진영高僧眞影을 마주한다. 이 가운데 특히 독성탱은 마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나한탱과 홀로 앉아 있는 고승진영의 도상이 결합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듯 독특한 특성을 지닌 독성탱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언제부터 유행하게 된것일까? 닮은 듯 서로 다른 직지사 독성탱 두 점을 통해 이와같은 독성탱의 일반적인 사항을 살펴보고, 아울러 이들 두 점의 그림이 지닌 독자성, 양자의 상이점과 공통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하얀 머리카락에 긴 눈썹의 노인의 모습을 한 독성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존자를 말한다. 독성은 일반적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 혹은 빈두로존자貧頭盧尊者를 가리키며 이를 그린 불화를 독성탱이라 부른다. 독성탱은 산신탱山神幀, 칠성탱七星幀 등과 삼성각三聖閣에 봉안되거나 독성각에 봉안되기도 한다.

  독성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을 살펴보면 인도에서는 독성을 상좌上座로 하는 풍습이 있으며, 중국 동진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신앙하고 송나라 태조 말기(471)에 법현法顯과 법경 등이 형상을 그려 공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독성에 대한 기록은 숙종19년(1693)에 풍남거사楓南居士가 지은 삼각산 경국사慶國寺의 「천태성전 상량문天台聖殿上樑文」이 있으며, 19세기에 접어들면 산신탱과 함께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예천 용문사 독성탱(1859년), 통도사 축서암 독성탱(1861년), 남원 실상사 독성탱(1873년) 등 현존하는 독성탱은 100여점으로 조선후기에 독성의식이 거행되면서 대부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조선후기 독성신앙獨聖信仰이 성행한 모습은 『제반문諸般文』과 『작법귀감作法龜鑑』등의 의식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성재의문獨聖儀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러러 고하노니 독성존자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인 그 중간의 세상에서 진계塵界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숨기고 드러냄이 자재하여, 혹은 층층대상層層臺上에서 좌선하거나 혹은 낙낙장송의 소나무 사이로 소요하여 왕래하거나, 혹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은은한 산속에 한 칸의 난야蘭若를 지어놓고는 앉거나 눕거나 하며 노닐고, 꽃은 환하게 피어나고 새는 지지배배 노래하며 성색이 분연紛然한 가운데 자재롭게 경행하며, 노을 같은 흰색 납의로 어깨를 반 쯤 드러내고 앉아 도를 즐기며, 눈빛같이 희고 긴 눈썹은 눈을 덮었다……(중략) 부처님으로부터 너는 열반에 들어가지 말고 말세중생의 복전이 되라는 당부를 받고 항상 천태산天台山에 있으면서 홀로 정혜를 쌍수雙修하고 열반에 들지 않음으로써 중생의 복전이 되고 있으면서 용화회상의 미륵부처를 기다리고 계시는 나반존자와 아울러 항상 존자를 따르는 모든 권속들께서는 이 도량에 강림하시어 저희들의 공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위의 내용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독성의 형상이 긴 눈썹을 하고 있다는 것과 부처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 천태산에 들어가 부처 열반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의 복전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십육나한十六羅漢 중 제1빈두로존자의 모습이나 성격과 일치하는 것으로, 독성이 빈두로존자를 의미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물론 문헌이나 경전에 독성이 빈두로존자라는 명확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는 십육나한의 성격을 가장 대표할 만한 빈두로존자를 독립시켜 신앙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독성의 모습이 19세기의 십육나한도에 그려진 나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십육나한탱(1892) 중 제11존자는 청룡사靑龍寺 독성탱(1891)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밖에 독성의 외형적 특징과 주변 경물에 대한 설명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석문의범釋門義範』「독성청獨聖請」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납霞納을 어깨에 걸치고 도를 즐기며 흰 눈썹을 덮고 공을 관하니 꽃은 만발하고 새는 재잘대어 소리와 색이 분연하네.’ 

  라는 내용처럼 실제로 독성탱을 보면 장삼을 걸치고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나반존자가 앉아 있고, 주변에는 화려한 꽃과 한 쌍의 새가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독성탱의 도상은 천태산이라고 추정되는 산수를 배경으로 긴 석장이나 불자를 들고 반석盤石 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주위에는 향로나 정병이 배치되기도 한다. 존상 구성은 혼자 수행하는 독성만을 표현했던 구도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과일이나 부채를 들거나 차를 달이는 시동侍童이 등장하는 구도로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나한탱의 변화 양상과 같다. 



  
  
 
   




 




 




 



 

  박물관에 소장된 두 점의 독성탱을 차례차례 살펴보려 한다. 먼저 <독성탱>(그림 1)을 보면 독성은 왼쪽 무릎을 세운 채 독성의 영험을 상징하는 영지와 약초를 왼손에 들고 있다. 그 뒤로는 소나무가 늘어져 있고 그 옆에는 계곡물이 암산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머리에는 원형 두광을 두르고 있으며 눈썹과 머리카락, 수염이 모두 하얗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검은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이마, 코 주위를 따라 약간의 음영을 가하였다. 수척하고 야윈 얼굴로 고행의 흔적이 엿보이며 굵은 주름과 지긋이 다문 입에서 고집스런 노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독성은 녹색의 옷 위에 붉은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가사 끝부분에 금선을 칠했다. 왼발을 보면 엄지발가락을 세우고 있는데 이러한 발 모양은 응상應祥과 약효若效가 활동한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불화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자세의 독성탱으로 통도사通度寺 옥련암玉連庵 <독성탱>(그림 2)이 전한다.   

  도안화 된 듯 그려진 산과 암석에는 남색, 청록으로 선염渲染하고 윤곽선은 가사와 마찬가지로 금선을 칠해 화면을 밝게 나타내었다. 독성을 감싸듯 서있는 소나무는 붉은 줄기에 수묵으로 가지의 반점을 묘사하고, 가지 위에는 청록의 무성한 잎과 함께 소나무 꽃이 떨어질 듯 섬세하게 그려졌다. 하단에는 ‘獨聖幀一軸奉安于本庵七星幀同時造成也’ 라는 화기畫記가 적혀 있어 독성탱은 칠성탱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어 함께 봉안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작품과 유사한 도상의 독성탱 초본이 현재 두 점 전해지는데, 19~2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개인 소장 독성탱 초본과 병진스님 소장 독성탱 초본이다. 그러나 직지사 독성탱과 두 점의 초본은 크기가 다르고 세부 표현에서 차이가 있어, 이 두 점의 초본 중에 하나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이 초본들을 보고 그린 그림을 베껴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독성탱과는 상반된 느낌을 주는 두 번째 <독성탱>(그림 3)을 살펴보겠다. 그림의 중앙에는 구름이 흘러가고 폭포가 흘러내리는 산수를 배경으로 붉은 장삼을 걸치고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독성이 앉아 있다. 독성은 왼손에 서기瑞氣가 뿜어 나오는 호리병을 들고 있는데 이는 십육나한탱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앞서 살펴 본 <독성탱>(그림 1)과 대조적으로 붉은 장삼을 풀어 상체를 훤히 드러낸 모습에서 활달함이 느껴지며, 장삼에는 황색의 선으로 원문을 그려 넣었고 그 안에 꽃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또한 옷 사이로 드러난 목과 가슴에 깊게 패인 주름, 축 늘어진 가슴은 노인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독성의 주위로 삼족향로, 활짝 핀 모란과 두 마리 새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모란은 민화에서 즐겨 사용하던 소재로 번영과 부귀, 그리고 행복을 상징한다. 독성의 뒤로는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과 일직선으로 흐르는 폭포가 보이는데, 민화의 금강산도 처럼 기암절벽이 단순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독성이 기거하는 천태산이라는 공간이 형식적인 상징성을 가지면서 도식적으로 변모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노란색 바탕 위에 산수와 바위의 윤곽선은 장삼자락과 같은 군청색을 칠하고 주변에 태점을 찍어 장식성을 가미하고 있다. 독성을 감싸듯 서있는 소나무 줄기에도 굵은 태점을 가하여 질감을 묘사하고 있다.   하단에는 ‘證明然庵亘修化主比丘尼吉祥信女甲辰生徐氏無着佛奉安于三角山忠國寺’ 라는 화기가 적혀 있어 삼각산三角山 충국사忠國寺에 봉안되었다가 20세기 초 어느 시기 즈음 직지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기에 적힌 증사證師를 맡은 연암 긍수然庵亘修는 1898년 남장사 칠성탱과 1905년 직지사 대웅전 삼장탱을 조성할 때에도 증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밖에 <독성탱>(그림 3)은 1888년에 조성된 강화도 백련사 <독성탱>(그림 4)과 유사한 구도를 보여준다. 독성을 둘러싼 배경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독성의 표정과 자세, 왼손에 든 지물에서 유사점이 발견되어 참고가 된다. 백련사 독성탱은 니봉중린尼峯仲麟, 성전性典이 담당하였으며, 보암긍법普庵肯法은 동일한 초본으로 삼성암 독성탱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두 작품(그림 3, 4)은 <독성탱>(그림 1)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ㆍ경기도 지역에서 사용하였던 하나의 도상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박물관 소장 독성탱을 고찰해 본 결과 독성은 조선중기 이후 불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널리 제작되어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독성탱은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거해 일정한 도상을 갖는 여래화ㆍ보살화와 달리 조선후기에 간행된 『제반문』ㆍ『석문의범』등 의식집 속에서 독성의 모습과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과 표현 면에서 18세기 이후 제작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나한탱과 양식적 연관성이 발견되고, 구름, 소나무, 바위, 불로초 등의 십장생이 독성탱 배경으로 사용되어 민화와의 교류 양상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현재에도 독성 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독성청을 행할 때 외우는 글 중에서 “만약 공양의 의례를 베풀면 반드시 신통으로 감지하여 베푸니, 구하는 바를 모두 좇아 소원을 이루게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을 통하여 이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독성탱은 조선후기 불교가 민간으로 확산됨에 따라 산신, 칠성과 더불어 현세에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으로 섬기게 되었고, 당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장  미(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