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淨甁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6-16    조회 : 6407

  
  우리 박물관에는 12세기쯤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이 전시되어 있다. 정병은 병甁의 한 종류로 주로 액체나 반액체를 담을 때 사용하는 그릇인데,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다. 둥그런 몸체 옆으로는 물을 따르도록 만든 귀때와 덮개가 있고, 몸체 위로는 가늘고 긴 목이 솟아오르다 밖으로 퍼져 원반 모양의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그 위로 대롱처럼 생긴 첨대가 길게 솟아있다. 이런 구조가 전형적인 정병의 모습이다.

 범어로 쿤디카kundika[군지軍持 ․ 군치가軍雉迦]라 부르는 정병은 병 또는 조병澡甁이라 번역되었고, 다른 이름으로 수병水甁, 감로병甘露甁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한다. 정병은 본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차츰 공양구供養具로 그 쓰임의 폭이 넓어지고 동시에 구제자의 상징이자 자비심을 표현하는 지물持物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특히 불교회화나 조각에서 관세음보살이 지니고 다니는 지물로 표현하는데, 이는 정병에 담겨 있는 감로수로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정병은, 송宋 휘종徽宗의 국신사國信使로 파견된 서긍徐兢이 고려 인종 1년(1123)에 엮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高麗圖經』) 을 통해 그 당시의 형태나 쓰임새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고려도경』 권31 <기명器皿> 편을 보면, “정병은 긴 목에 불룩한 배 모양인데, 곁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주둥이가 하나 있다. 정병의 가운데에 두 마디가 있는데, 또한 줄을 맬 수 있는 고리 역할을 한다. 뚜껑의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턱 위에는 다시 작은 목이 있어 비녀나 붓의 형상을 띤다. 귀인貴人과 국관國官, 관사觀寺(도관과 사찰)와 민가民舍에서 모두 사용하는데, 물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자 2치이고, 배의 지름은 4치이며, 용량은 3되이다. [淨甁之狀 長頸脩腹 旁有一流 中爲兩節 仍有轆轤. 蓋頸中閒 有隔. 隔之上 復有小頸 象簪筆形. 貴人國官 觀寺民舍 皆用之 惟可貯水. 高一尺二寸 腹徑四寸 量容三升.]”라고 하였다.

 또 정병과 관련한 기록 가운데 당대唐代의 불교 제반 상황과 승원僧院에서의 생활 등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이하 『남해기귀내법전』)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은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지은 책으로, 이 책의 권 제일 수유이병水有二甁 조를 보면 병의 형태를 묘사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뚜껑은 모름지기 주둥이에 연결시키고 꼭대기에 돌대를 세우되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 한다. 그 위에 조그만 구멍을 통하게 하여 동저銅箸와 같이 한다. 마시는 물은 그 속에 담아 방변傍邊에 따로 동그란 구멍을 뚫어 옹구擁口로 부터 올라가게 한다. 세운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서 구멍은 동전 크기와 같게 한다. 2~3되는 들어가게 해야 할 것이며 이보다 작으면 쓸데가 없을 것이다.
[蓋湏連口 頂出尖臺 可高兩指. 上通小穴 麤如銅箸. 飮水令上 此中傍邊 則別開圓孔 擁口令上. 竪高兩指 孔如錢許. 添水宜於此處 可水二三升 小成夭用.]

『남해기귀내법전』에 기록된 병의 모습은 『고려도경』에서 설명하는 정병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남해기귀내법전』이 당나라 때에 지어진 점을 고려해 볼 때, 정병의 형태는  고려시대 보다 이른 7~8세기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도경』을 통해 고려시대에 정병은 귀인에서 서민, 민간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물은 그 쓰임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 마련인데, 정병은 ‘정淨’과 ‘병甁’ 자字가 합쳐진 복합어複合語로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남해기귀내법전』이 불교와 승원에서의 생활에 중점을 둔 사료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정병은 단순한 그릇으로서의 의미보다 공양구로서의 의미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은 『고려도경』과 『남해기귀내법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며, 모두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각 정병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림 2]의 정병은 표면에 푸른 녹이 피었지만, 유물 상태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정병은 일반적으로 12세기에 들어서야 귀때 덮개가 만들어지는데, 이 정병은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림 3]의 정병은 [그림 2]의 정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인 크기나 첨대, 목, 몸체, 굽, 귀때 등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표면을 보면 녹이 핀 정도가 심하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도 보인다. 첨대와 목 부분 사이의 둥근 테 부분을 보면 다른 정병들 보다 도톰한 것이 특징이다. 귀때 옆에는 연결고리가 있어 덮개와 귀때를 고정시켜주는데, 보통 실로 연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정병 귀때에 부착된 연결고리에는 실 대신 못으로 고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후대에 연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자는 일반적으로 비색을 띄지만 [그림 4]의 청자정병은 제작 당시 가마에 불을 땔 때 열이 골고루 미치지 않아 부분적으로 갈색을 띈다. [그림1], [그림2]와 비교해 볼 때, 크기는 작지만 전반적으로 청동정병의 모습과 비슷하다.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는 온전히 남아 있지만 현재 덮개는 없다.

  

 이 세 점의 유물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정병을 만든 재료가 다른데, 왜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가 였다. 보통 물체는 쓰임새가 같더라도 재료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혹 재료의 한계를 극복해서 기물을 만들더라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세 정병의 경우는 그 반대인데, 왜 그런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은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事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망월불교대사전』을 보면 정병에 대해, “병은 정병과 촉병觸甁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정병 물로는 깨끗한 손을 씻고, 촉병 물로는 더러운 손을 씻는다. 정병은 도자기로 만들고 촉병은 금속으로 만든 것이 쓰인다.” 라는 기록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에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있는데, “무릇 물은 정淨과 촉觸으로 나누는데 병은 2개이다. 정병은 와자瓦瓷 또는 도제陶製를 쓰고 촉병은 동철銅鐵을 겸하게 한다.” 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정병을 만든 재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고, 용도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병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앞서 『남해기귀내법전』에 병의 모양을 설명한 기록을 참고하면 정병과 촉병의 생김새는 흡사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12세기에 만들어진 정병을 살펴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정병을 재료와 쓰임새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병과 촉병의 구분이 모호해져 이름은 정병으로, 쓰임새는 공양구에서 다양한 계층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공예는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그릇이다. 정병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공예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공양구였다. 비록 이 세 점의 정병과 몇몇의 기록으로 그 당시 문화상과 정병의 변화에 대해서 명확히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 ․ 청자정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정병에 비해 장식도 없고, 유물의 형태도 완전한 것도 아니어서 소소해 보일지 모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그 속에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흔적이 보이고, 더불어 고도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점을 알 수 있다.




조상준(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