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7권 2책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5-02-20    조회 : 4662
  


묘법연화경 7권 2책, 안심사 개판, 종이에 목판 인쇄
26.9×17.0cm‧반곽 21.4×13.7cm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7권 2책이 2005년 2월 18일부터 4월 3일까지 서울 일민미술관 특별전 <한국의 古版畵>에 출품된다. 『묘법연화경』은 대표적인 불교 경전의 하나로서 『반야경』‧『유마경』‧『화엄경』 등과 함께 초기 대승경전에 속한다. 이 경전은 서북인도에서 성립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내용이 추가‧보완된 뒤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축법호竺法護의 『정법화경正法華經』(276),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묘법연화경』(406),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摩笈多가 함께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601)이 현재 남아있는 한역본漢譯本 경전인데, 이중 구마라집의 번역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경전이 이미 삼국시대에 전해져서 읽혀졌으며, 고려시대에는 공덕경으로서 필사되고 간행되었다. 불교가 핍박받은 조선시대에도 경전신앙의 성행에 따라 법화경이 많이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판본은 고려시대 3종과 조선시대 117종이며, 경판으로는 34종 3036매가 있다고 한다.

직지성보박물관 소장 『묘법연화경』은 중국 송나라의 승려 계환戒環이 1126년에 저술한 『묘법연화경요해妙法蓮華經要解』로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에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전이 고려 말기 강진의 백련사에서 처음 간행되어 조선 초기에는 범불교적으로 널리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책이 법화도량의 강본으로 널리 사용되는 한편, 참회‧정토왕생 등의 신앙 등과 결부되면서 공덕경功德經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필사한 저본을 조선 태종 5년(1405)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목판으로 새겨서, 이를 나중에 찍어낸 것으로, 1권~3권을 1책으로 묶고 4권~7권을 또 한 책으로 묶은, 총 7권 2책 완질본이다. 고려시대 판본을 빼고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귀중한 판본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지난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경전의 글씨를 쓴 성달생成達生과 성개成槪는 성석용成石瑢(1352~1403)의 두 아들로, 성달생은 태종2년 조선시대 처음으로 이루어진 무과시험에, 성개 역시 태종 때 열린 문과에 각각 장원급제한 매우 특출한 인물들이었다. 형은 무예, 동생은 문장에 능했을 뿐 아니라 각기 글씨도 잘 썼음은 이 책을 통해 증명된다.

목판을 인경印經한 옛 책은 오늘날처럼 컴퓨터와 인쇄기라는 기계를 통해 입력하고 편집하여 출력해서 제본하는 과정을 거치면 수천·수만 권씩 만들어 낼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용 저술의 과정은 제쳐 두고라도, 글 내용을 손으로 정성들여 쓰고 그 글자들을 낱낱이 목판에 새겨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여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인경했을 때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하려면 글자를 거꾸로 새겨야 했는데 이 또한 아주 곤욕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목판에 새겨진 글자들을 종이에 찍어 내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다. 또 목판을 직접 보게 되면, 글씨만 남겨놓고 주변을 무수히 깎아낸 칼자국에서 이것이 대단한 공력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하나의 경전은 귀중한 문헌자료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쏟은 노력과 신앙심이 담긴 유물이다.
  

책의 체제는 크게 나누어 변상도와 경전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머리에는 불‧법‧승을 수호하는 위태천이 그려졌으며 다음으로 석가모니가 영축산 위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가 5면에 걸쳐 이어진다. 변상도 끝에는 ‘정씨鄭氏의 시주로 고려 우왕禑王의 극락왕생을 위해 변상도를 그리고 목판에 새겨 유통시킨다’라는 글을 새겼다. 네 변을 연꽃무늬로 이어 장식한 틀 안에 변상도를 마련했는데, 그 새김이 매우 정교하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보살과 제자‧사천왕‧팔부중 등 여러 권속도 다채로운 자세와 표정으로 능숙하게 재현되었다. 화면 하단에는 ‘佛□□’와 각수인 ‘玄刀’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본문에 저본으로 사용된 글씨는 대체로 가늘고 섬세하지만 힘있는 해서체로 아름답게 쓰여졌는데, 목판으로 옮길 때 그 필세와 용필의 특징을 잘 살려내어 판각하였다. 계선界線 없이 정갈하게 새겨진 본문에는 인쇄된 뒤에 공부를 위해 누군가 묵서로 쓴 구결口訣과 두주頭註가 쓰여 있다.

2책 뒷부분에 수록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발문에 따르면, 조계종 대선大選인 신희信希가 나이 드신 분[耆老]들을 위해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간 크기의 글자로 간행하고자 했는데, 때마침 성달생‧성개 형제가 부친의 상중喪中에 이 소식을 듣고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필사하였으며, 이를 신문信文이 안심사로 가져가 간행하였다고 한다. 조계종 승려 신희의 주도로 천태계 강본인 법화경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계종과 천태종 사이에 사상적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려 주며, 이는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 발문을 쓴 권근은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활약한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다. 그는 태조의 명으로 <별원법화경발서別願法華經跋書>와 보신각종의 명문을 짓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양촌집陽村集』,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등이 있다. 1403년에는 태종의 명에 의해 하륜河崙·이첨李詹 등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기도 했다. 경학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는데,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인 사헌부의 위엄과 조선 건국을 예찬한 경기체가 <상대별곡霜臺別曲>이 그의 작품이다.
권근의 발문에 이어서는 토산군 부인兎山郡夫人 김씨金氏, 전사헌시사前司憲侍史 송결宋潔의 처 영인令人 원씨元氏, 여산군 부인礪山郡夫人 송씨宋氏 등의 시주자 이름이 있다. 사경과 그 사경을 판각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화와 인력을 누군가가 지원해 주어야 책이 완성되기 때문에 현실적 측면에서 이들 시주자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단순히 경전 한 권을 만들 수 있도록 원조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게 기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투철한 종교적 신념이 없고서야 어찌 그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사경하고, 판각하고, 인경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낡고 오래되어서 누렇게 변색되고 헐어버린 고경전 두 권 앞에서 조심스럽고 경건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속물적인 골동취미가 있어서도, 혹은 이것이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과 그들이 쌓은 위대한 공덕이 이 오래된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재원(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