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태실 定宗 胎室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6-01    조회 : 4291
태(胎)는 예로부터 생명의 근원이자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는 연결선으로 소중히 다루어졌다.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된다하여 아기가 태어나면 전국에서 길지를 골라 태실(胎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하였다. 후에 왕위에 오른 이의 태실은 태봉(胎峰)으로 격상되었고 태봉이 들어선 고을은 그 격을 높여주었다. 조선시대에 태실은 남쪽이 길하다는 풍수지리에 따라 대부분 충청도.경상도.전라도 지역에 모셔졌고, 영남의 첫머리에 자리한 김천에는  조선 초에 정종(定宗)의 어태가 안치되었다.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1357-1419)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함흥 귀주동(歸州洞)에서 태어났으며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그의 태(胎)는 고향에 갈무리되었다. 실록에는 정종 1년(1399)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조진(趙珍)을 보내어 김산현(金山縣)에 태를 안치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였다. 정종 어태의 안태처(安胎處)에 대해 직지사 사적비(1681년)나 사적기는 황악산 한 자락인 ‘절의 북쪽 봉우리’[寺之北峯]로 언급하고 있다. 태를 안치했다는 직지사 북쪽 봉우리는 바로 대웅전 뒤에 나지막하게 솟은 산을 가리킨다. 절의 뒷산에 태실이 자리하면서 직지사는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써 토지 15결(結)과 노비 10구(口)를 하사받기도 하였으나 사찰 위치가 태실과 너무 근접하다하여 다른 태실을 정비할 때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태실이 태봉으로 봉해지면 그 격에 맞게 내부와 외부에 석물을 추가한다. 기록에 따르면 태실 내부에는 사방석(四方石), 중동석(中童石), 개첨석(盖簷石), 상석(裳石) 등을 만들고 외부는 연엽주석(蓮葉柱石), 횡죽석(橫竹石), 우전석(隅磚石), 표석(標石), 비석(碑石) 등을 둔다.《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에 실린 정조 태실과 현존하는 태실들의 구조를 살펴보면, 밖은 팔각형으로 난간을 두르고 안에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처럼 생긴 석조물이 자리한다. 정종의 태실도 이와같은 구조였겠지만 1926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태실 조사때 태항아리를 꺼내기 위해 석물이 파헤쳐지면서 원형을 잃어버렸다. 다만 산재된 석물 중 태실 가운데에 자리했던 태실석들과 난간의 기둥[柱石] 2점만이 직지사 천불선원과 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져 보호 중이다.    
태실석은 방형의 하대석 위에 팔각형의 이중기단과 팔각형의 몸돌[中童石]로 이루어졌고 여덟면을 부드럽게 마무리한 지붕돌[盖簷石]이 덮혀있다. 다른 태실은 몸돌이 계란형이나 원형이지만 정종 태실의 몸돌은 특이하게 팔각형을 하고 있다. 높이는 160cm 정도이고 화강암의 품성을 살려 만든 듯 팔각형의 생김새에는 담백하면서도 건실함이 배어있다. 난간석을 이루는 기둥은 맨 위를 원추형으로 다듬고 3단으로 된 테두리는 돋을새김하여 마지막 단은 연주문(聯珠文)으로 처리하였고, 이어 얕게 돋을새김한 2단의 테두리도 마지막 단은 연주문으로 마무리하였다. 기둥 양옆은 난간을 가로지르는 횡죽석(橫竹石)을 얹을 수 있도록 튀어나와 있고 그 아래는 대나무 마디모양으로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큰 기교를 부리지 않은 기둥의 모양새 역시 소박하고 정감있다. 2개의 기둥 높이는 133cm와 135cm이다. 두 기둥간의 간격과 좌우가 넓은 오각형의 기단석 모양을 미루어 보면 정종 태실의 난간도 팔각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종의 태항아리는 전국에 산재된 다른 48기의 태항아리와 함께 1929년에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새롭게 만든 정종 태실은 기단석 위에 표비석을 두고 그 아래에는 시멘트 관을 마련해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을 안치하였다. 표비석에는 ‘正宗大王胎室’과 ‘○○○年五月自慶尙北金泉郡垈項面移封’이라 적혀있고 지석에는 ‘高麗恭愍王六年丁酉七月一日生 定宗大王 藏于金泉郡垈項面 昭和四年 月 日 移藏’이라 새겨져 있다. 태항아리는 질그릇으로 된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이루어져 있다. 매병처럼 생긴 내항아리는 뚜껑이 없고 안에서는 동전, 금.은박과 같은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질박한 외항아리는 어깨 부분이 배가 부르며 납작하고 둥근 뚜껑을 덮었다. 표면에는 주색으로 쓴 ‘乾’자 등의 한자와 봉합천인 주칠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왕가의 태는 백자항아리에 담아 다시 큰 항아리 안에 넣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서삼릉에 안치된 태항아리 중에는 이처럼 소박한 질그릇으로 된 내항아리가 여러 점이 출토되어 그 진위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이용윤(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