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회화관 - 안휘준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13-05-23    조회 : 1926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회화를 대체로 즐겨 하면서도 그것을 직업으로 하거나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화원들에 대해서는 매우 천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 점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사회적 신분이 엄격하고 또한 사농공상 등 직업의 귀천이 뚜렷했던 당시에는 어쩌면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일 주목을 끄는 것은 『고려사』의 「방기편」에 있는 “대저 한 가지 예술로써 이름을 얻는 것은 비록 군자에겐 부끄러운 일이나 국가에는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견해라기보다는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사대부들의 견해로 믿어진다. 이와 비슷한 말기末技 또는 소기小技의 개념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사대부 화가였던 강희안의 행장行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자기의 그림솜씨를 감추고 남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자제들 중에 그의 서화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서화는 천기賤技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이름에 욕이 된다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것의 사실 여부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 학자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훨씬 연대가 내려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가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한다는 얘기를 신하로부터 들은 영조가 특별히 일러서 말하기를 “말세라서 시기하는 마음이 많으므로 혹시 사람들이 천기에 능한 소인으로 얕볼까 염려되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마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강세황은 화필을 불태우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강희안과 강세황의 경우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화를 잘하면서도 혹시나 천시당할까, 또는 회화를 잘하는 낮은 신분의 화원과 동류로 대우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의 문화적 부흥에 기반을 형성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영조도 비슷한 우려를, 특히 문화의 꽃이 피던 당시에 표명하였던 것을 보면 그러한 경향이 얼마나 강하고 뿌리 깊었던 것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의 여기저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성종 때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최경崔涇이 당상관에 제수되었을 당시에 사대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린 항의의 상소문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화공잡기畵工雜技’ ‘화공천기畵工賤技’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회화에 관해서는 ‘회화는 국체國體와는 관계가 없는 호상잡기好尙雜技’라고 잘라서 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회화나 그것을 그리는 화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의 사대부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사랑하고 화원을 위해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던 현명한 왕과 사대부들이 공존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왕이 초기의 세종과 성종, 후기의 정조 등이다. 아마도 사대부 화가들이 그와 같은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화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론적 근거는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 “회화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보편화된 생각에 있었다고 믿어진다. 실제로 회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던 사대부들에게 그것을 아끼는 사람들은 “화사畵事는 치도治道와는 관계가 없어도 폐절廢絶할 수는 없다”거나 “백공기예百工技藝는 나라에 한 가지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대답으로 맞섰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이고 궁여지책의 답변으로 보이는 이러한 말에 반대의사를 표명한 사대부는 없었다. 아마도 이에는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대부들이 회화나 화원을 깎아내리는 얘기를 한 것은, 왕이 지나치게 예술에 빠진 나머지 정치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과, 화원들의 신분을 상승시킴으로써 사대부들의 확고한 지위와 권위가 다소라도 손상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연유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사실상 왕이 회화를 비롯한 완물玩物 때문에 정치적 의욕을 상실할까 두려워서 화사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는 일이 잦았고, 또한 공이 있는 화원에 대한 포상은 환영하지만 사대부만이 임명될 수 있는 직급의 승급이나 제수는 극력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조선시대를 일관하여 보이지만, 특히 회화를 몹시 좋아했고, 화원이었던 최경을 당상관으로까지 승진시켰던 성종에 대한 당시 신하들의 진언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그림과 화원 그 자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나치게 좋아함으로써 파생될 수 있는 ‘완물상지玩物喪志’와 같은 부작용을 경계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대부들이 회화에 비교적 소극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몇 점씩의 회화는 대개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많은 사대부들은 회화 자체는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초래될지도 모를 불이익을 염려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래서 회화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글은 안휘준,『한국 그림의 전통』(사회평론사, 2012)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