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의 역사적 전승 2 -조요한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12-21    조회 : 6294
* 1에서 계속
 

  풍속화와 사실화는 눈을 자연에서 인간의 일상생활과 가축으로 돌려 한국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선구적인 표현이었다. 풍속화의 김홍도와 신윤복은 동배로서 삼강오륜의 유교만이 유일한 생활신조였던 당시에 그 테두리를 벗어난 호방한 자유주의자들이었고, 토착적인 해학미를 은근하게 드러낸 작가들이었다. 김홍도는 산수화에서도 남북화를 종합하여 능히 일가를 이루었지만, 특히 인물의 동작 사생에 눈을 돌려 동양화가 화제로 삼지 않았던 서민층의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했고, 신윤복은 아리따운 부녀자를 중심으로 은은한 색채에 의한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묘사하여,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사실화를 이루었다는 변상벽은 산수, 사군자, 초상에 그쳤던 당시의 화풍에 동물화를 그렸고 닭이나 으르렁대는 고양이의 동적 찰나를 유머러스하게 잘 묘사했다. 그의 작품으로 위에서 이미 적한 <묘작도>나, <계투도鷄鬪圖>는 동물의 털하나하나를 사실 그대로 묘사해다 하여 사실화라 일컫는데, 그보다도 동물들의 긴장된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석해도 좋겠다.

  이 풍속화가나 사실화가들은 한국예술의 독특한 맛인 해학미를 잘 표현했다. 풍속화가들은 외모를 장식하고 위선에 빠지는 유생의 나쁜 풍조에 대해 비판적인 웃음으로 일종의 조용한 개혁을 의도한 데 비해, 사실화의 변상벽은 적극적인 의도나 부담 없이 가벼운 웃음을 표현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들이 좀 더 본격적인 ‘홍소哄笑의 일제사격’, 또는 ‘해학에 있어서의 숙고’를 담은 희극정신이 없는 것이 유감일 따름이다.

  안견을 기점으로 중국의 북화 남화를 종합하여 새로운 회화를 이루려던 조선 회화는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 독창적인 길을 닦아 비장미를 나타낸 진경산수화와 초상화, 그리고 해학미를 나타낸 풍속화와 사실화의 새 화풍 수립에 성공했다. 이 새 화풍은 역시 안견의 계보를 받아내려온 것이고, 또 이 조선회화의 성립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 이후의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회화의 정신은 고구려 분묘에 그려진 벽화에서 시작되었다. 이 고분벽화는 낙랑계 중국인들의 영향 하에서 5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통구通溝에 있는 무용총의 <가무도歌舞圖>는 남녀혼성의 무인들과 가수들이 각기 열지어 있는 그림인데, 맥쿤 여사는 “주름잡힌 치마, 길게 입은 속옷, 축 처진 바지, 뾰족한 신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한국 무인들의 복장과 흡사하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복장과 가무의 방법이 15세기 후의 오늘날과 비슷하다는 것은 한국회화 정신의 흐름을 더듬어 우리에게는 일종의 암시적인 것을 준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앞서 언급한 우현리대묘遇賢里大墓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이다. 그 힘찬 선의 묘사나 화려하고 조화된 색채 모습은 한국의 역동적인 미를 대표하는 것으로 한국회화의 절품이다. 이 고구려 벽화에 대해 윤희순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수도四獸圖> 선의 웅장한 흐름, 이를테면 청룡, 백호의 등과 배로 꿈틀거리며 흘러내려간 강경하고도 원만한 조율, 천인과 새의 시원하고 유창한 필치, 구름을 표현한 곡선의 활달 경묘한 솜씨, 연화문양의 바람에 날리는 듯한 율동, 산의 상징적인 장쾌한 직선 등이 어우러져 호연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전신의 혼을 휩싸며 육박해오는 것이다.… 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빛깔에 혼이 돌고 묵빛에 물기가 있어 이제 금방 붓을 뗀 것 같다.고분 내의 알맞은 습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림이 훌륭하지 않고는 이렇게 생동하는 운치를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백호, 청룡의 번쩍 든 앞발은 황해 물을 한숨에라도 삼켜버릴 만한 고구려의 기상이다.

 

  물론 고구려의 억센 대륙기질이 신라의 부드러운 해양기질로 내려오면서 세련되고 순화되어 ‘힘의 예술’로 되고, 조선의 ‘멋의 예술’이 되었다고 고찰하는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고구려에서 시작된 역동적인 미가 고려의 벽화를 통해 조선 후기의 화가들에게서 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부석사 신조전의 고려 벽화 <사천왕상>은 녹색 바탕에 암적색의 배함을 주어 동작에 액센트를 주고 있는 모습이 당의 화풍을 채용하면서도 그보다는 고구려 벽화의 역동미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이런 줄기찬 흐름이 조선 후기 회화의 본이 된 것인 줄 안다.

 

 

 

 

 

 

 

 

 

 

 

*이 글은 조요한,『예술 철학』(미술문화, 2005) 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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