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의 역사적 전승-조요한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12-11    조회 : 5620
한국미의 역사적 전승

  작품의 예술성이 제작하는 예술가의 정신적 소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술품 속에 그것을 제작한 예술가의 민족적 예술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그 증거로는 이민족의 예술작품은 뚜렷이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같은 민족의 예술품에는 유파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어딘가 상통하는 맥이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를 보면, 아레나 성당이나, 피렌체의 성 크로체(St. Croce)사원 등에 그려진 지오토의 벽화 속 사람들의 모습이 목에서 등까지의 윤곽이 강하게 뒤로 구부러져 있는 건강한 체격과 긴 머리칼을 갖고 있는데, 그보다 1세기 후에 마사치오가 피렌체의 카르미네(Carmine) 사원에 그린 프레스코화 <헌금> 속 인물들이 윤곽이 활모양으로 굽어 있고, 더욱 좋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마사치오보다 1세기 후 로마의 시스틴 예배당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그림 속 인물들은 더욱 웅대한 체격을 나타내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이오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크로체 사원의 지오토 그림과 카르미네 사원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하여 미술수업을 쌓았다.

  마사치오가 지오토의 화법을 배웠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위대한 서 피렌체의 화가들이 그린 인물화의 윤곽들에는 하나의 예술사적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세 화가의 화풍을 거슬러가면 이탈리아나 비잔틴의 모자이크에 흐르는 조형미의 전통이 스며 있다. 물론 지오토는 이탈리아나 비잔틴의 판에 박힌 형태에서 벗어나 최대의 입체성과 자연주의의 화풍을 형성하려 했고, 장면에 정열과 상상을 주어 미술사에 괄목할 만한 새로운 선을 그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오토의 ‘등背의 형태’가 2세기 후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주었듯, 라벤나에 있는 여러 성당들의 모자이크 인체표현인 르네상스 회화의 바탕에 영향을 주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회화의 형성에서도 상황은 같다. 조선화의 시조라고 일컫는 안견은 마사치오와 동시대인 15세기, 즉 세종 때의 화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안평대군의 인정을 받아 대군의 소장이었던 송ㆍ원의 명화, 그 중에서도 곽희, 마원 등의 북송대가들의 작품을 접했다. 그가 북송의 화풍을 좇아 그린 것이 유명한<몽유도원도>이다. 이 작품은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인데, 고유섭은 이렇게 평했다.

 

  산심山深, 수심水深하되 나루터의 일엽편주도 버린 채 인적은 없고, 사립문이 반쯤 열린 초가집 몇 채, 시끄럽게 울어대는 닭과 개, 산새들도 없이 정적하기 짝이 없는 화경畵境이다.

 

  그러나 안견은 자연의 좁은 경치의 경계를 그려 시적 정취를 돋우는 남송의 마하화풍馬夏畵風도 함께 받아 그 영향으로 <적벽도>, <산수화첩>을 제작하여 후기 조선화의 방향을 시사하기도 한 셈이다. 조선 초기의 명화가들, 즉 석경, 정세광, 신사임당, 양팽손, 이정, 이징 등은 직간접으로 안견의 필운을 이어받아왔다.

  보통 일컬어지는 대로 조선 회화는 그 전기(15~16세기)에는 북화 화풍을 보였고, 후기(17~18세기)에는 남화의 필법을 택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의한 정신적 고통이 계기가 되어 북화계도 남화류도 아닌 새로운 조선화풍이 대두되어 단도직입적인 필법과 구도로 화면을 처리했다. 후기에 와서 본격화된 그 혁신적인 유파가 곧 (1) 정선을 위시한 진경산수화, (2) 이름 모른 화원들의 초상화 (3)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 (4) 변상벽 중심의 사실화이다. 이들은 필법과 구도와 화제에서 모두 종래의 중국화풍을 벗어나 현실생활에 깊이 파고들어 자아표현의 화풍을 수립하고 한국고유의 정취를 개발하려 했다.
  

  처음 두 화풍, 즉 진경산수화와 초상화의 화풍은 종래의 평면적인 동양화의 화풍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화가 갖고 있는 입체적인 음영묘사를 취하여 한국회화에 새로운 기점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한국작품에 결여되었던 비장미 창조에 큰 몫을 했다. 정선은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강산도>와 <인왕제색도> 등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중국의 상상적인 산수도를 지양하고 한국의 자연을 자기 눈으로 보고 느낀 대로 그의 독측한 준법을 사용하여 자연을 무한대로 돋우어 놓은 것이다. 이 화풍은 심사정에게 전해져서 그의<응치도鷹雉圖>에서 보는 대로 참신한 구성과 자유로운 필법을 가져왔다.
  

  조선 초상화의 수법은 동양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얼굴에 음영을 주고, 눈의 영채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작가 미상의 <도암 이재 초상陶庵 李縡 肖像>이나 <김리안 초상金履安 肖像>에서 보여주는 대로 동양화의 백선을 기조로 하면서도 서양화의 입체표현에 의한 충실감을 잘 나타내었다. 윤희순은 조선의 초상화가들이 “살결주름 문양〔肉理紋〕으로 얼굴 주름살과 조식과 피부의 살결을 따라 선을 율동적으로 운동시켜서 생리적 요철과 성격적인 자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진경산수화는 실제 풍경을 사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적극적인 확대를 기도하는 화풍으로 비애의 미와는 전혀 다른 숭고미의 요소를 구성했고, 초상화는 기운이 생동하는 얼굴을 입체적으로 부각시켜 동양적인 체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인생태도로서 비극 극복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단지 내적 고민이나 절마의 자기분열을 거쳐 좀더 역사의식을 갖는 ‘비극의 지知’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 이 글은 조요한,『예술 철학』(미술문화, 2005) 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