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연과 그 미 -조요한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10-20    조회 : 4790

한국문화의 풍토적인 연구는 이미 널리 이루어진 바 있다. 18세기 헤르데 같은 학자가 인간문화가 그 풍토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의 암석과 식물을 포함한 풍토의 차이가 주민의 고유한 품성의 차이를 만들었다. 단지 땅 위에 있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공기와 물처럼 땅 속에 있는 것과 태양과 무수한 별과 같은 하늘에 있는 것까지도...
- J. G. von Herder -


  즉 ‘우리의 감각은 풍토적이어서’ 물이 부족하고 식물이 적은 지역의 주민들은 맛의 섬세한 선택 없이 그것을 취하지만, 물이 풍부한 지역의 주민은 물맛까지도 분별하는 섬세한 미각을 갖고 있고, 밝은 태양 빛의 풍토에 사는 사람들은 시각이 발달하지만 흐린 날씨가 많은 지역의 주민은 청각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또 ‘인간의 상상력도 풍토적이어서’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과 해안지대에 사는 사람의 관념이 다르고, 열대지방과 한대지방의 동화나 전설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영향으로 텐느는 『예술철학』에서 남구와 북구의 다른 자연 환경에서 어떻게 상이한 미술이 탄생되었는가를 기술했다.
  즉 남구의 그리스인은 지중해의 풍토적인 형향으로 이상세계의 착상뿐만 아니라, 자기 초상에 이르기까지 형태를 단순화하고 가장 중요한 특색만을 받아들인 데 반해, 북구의 플랑드르 사람들은 성자의 이상적인 인격도 자연의 세부까지 묘사했다. 그리스인은 강과 나무  등의 풍경의 세부는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한 데 반해, 플랑드르 사람들의 풍경화는 선택에 주의를 돌리지 않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텐느는 이렇게 기술했다.
  건조한 나라에서는 선이 주조가 되고 그것이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산에는 웅대한 몇 층의 건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든 대상이 투명한 공기 속에 선명하게 부조된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평탄한 눈에는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떠 있다. 주가 되는 것은 색조뿐이다. 풀을 뜯고 있는 암소, 목장 속에 있는 지붕, 난간에 기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다른 모습의 일부로서 보일 따름이다 대상은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고, 갑자기 주위에서 뛰쳐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체의 가감과 농담에 감동할 따름이다.
  동양화, 즉 중국화는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대지의 혜택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연의 은총을 찬미하고 그와 일체가 되기를 바란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함이 없이 변화하려는〔無爲而化〕 선가의 사상과 희로애락이 아직 펼쳐져 나오지 않은 상태, 즉 중(中)이라는 유가의 사상이 나올법한 자연환경이다. 그러나 중국화도 북송의 산수화가 묵의 농담으로써 자연의 모습과 대기의 변화를 섬세히 그리려는 데 반해, 남송의 문인화는 대상의 형태를 정밀하게 그리지 않고, 화가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텐느의 자연환경설이 거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텐느의 자연환경에 의한 조형미 표현의 차이를 한국미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맑은 공기와 강렬한 태양이 있는 한국의 자연에서 한국의 미술은 남구의 표현과도 같이 자연의 세부를 묘사하느니보다 형을 단순화하고 이상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에 대해 스완의 지적은 우리의 고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중국, 한국, 일본의 미술』(1963)에서 한국의 풍토에서 오는 영향을 말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는 달리 서구적인 감동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다. 한국이 18세기에 획득한 독자성을 다른 두 나라와 분리시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분명히 조선회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과는 다르다. 정선의 <금강산도>와 김홍도의 <자정紫頂>에는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하나의 의식적인 과정이 있다. 그 외에도 이인문의 <江山無盡圖>같은 그림은 독자적인 청아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인은 심지어 중국인보다도 환상적인 풍경을 더 잘 구사한다.
  남구의 그리스인들은 선을 주조로 삼아 중요한 측색만을 표현하는 경향과도 같이 한국인은 조형미 구성에 있어 사실을 떠나 ‘의식적인 과장’과 ‘환상적인 표현’을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은 산고수려山高水麗하여 고려라 일컬어져왔고, 아침이 맑은 나라여서 조선이라 불리었다. 한국의 자연은 요란스럽게 우뚝 선 고령이 있어 위압하거나 도도히 흐르는 대하가 있어 웅장한 느낌으로 사로잡지 않는다. 바다는 모두 내해內海로서 평화로운 기분을 자아내니, 한국인은 남달리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살아왔다. 맥쿤 여사가 그의 『한국 미술』(1962)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미의 특징은, 첫째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보수성과 둘째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다. 즉 한국은 중국보다 시간의 변화가 느려서 옛 방식이 새 형식으로 대치되지 않고 있다. 또 국토에 대한 애착은 ‘한국인의 생활을 기본적인 모습’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첫째의 보수성과 둘째의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한국인은 모든 일이 집 밖에서 행한다. 농민들은 ‘마당’에서 모든 일을 행하고, 귀족들은 ‘정자’에서 행하는 것이 그 보편적인 모습이다. 음악과 무용이 다 집 밖에서 행해지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민족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한국은 동반구의 동쪽에 자리 잡은 대륙에서 돌출한 반도이다. 반도란 대륙도 섬도 아니면서 대륙성과 해양성의 양면을 지닌 곳이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큰 호수와 넓은 평야가 적은 데다 해류관계로 낮과 밤의 기후변화가 많고 더위와 추위의 차이가 심한 대륙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17580㎞라는 해안선의 길이 때문에 섬나라 같은 밝고 아담한 경치를 갖고 있어 그 기질이 퍽이나 해양적인 면이 강하다
  ‘자연과 역사는 언제나 예술의’ 산보라고 보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의 『조선과 그 예술』에서 “반도라는 것이 드디어 이 나라의 운명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전제하고, 극동을 이루고 있는 세 나라가 어떻게 다른 역사와 예술을 나타냈는가를 기술했다. 즉 중국은 대륙이어서 대지에 평안을 누리고 의자가 강경한 데 비해, 섬나라인 일본은 대지에 즐거움을 느끼고 인정은 안락하다. 이에 비해 조선은 땅에서 형안을 얻지 못하고 그 마음이 고요하다. 조형미의 표현에서, “강경함은 형을 택하고 안락함은 색을 구하나 고요함은 선을 취했다”고 하면서, “중국의 예술이 의지의 예술이고, 일본의 예술이 정취의 예술이었으나, 그 사이에 홀로 비애의 운명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조선의 예술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비애와 고통이 숙명적인 것이 될 때, 거기에서 생기는 조형미가 선의 예술이 된다고 하는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 예증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즉 토함산 석굴 속의 십일면관음과 네 명의 여보살과 십대제자들의 모습들이 ‘흐르는 몇 줄의 선’이라고 하고, “비할 데 없는 저 봉덕사의 범종에 조각된 비천도의 천녀는 옷과 구름의 파도를 헤치고 흐르는 것같이 떠 있지 않는가?”하고 반문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는, ‘가늘게 긴 곡선 속에 일종의 문양’이고, 첨성대의 형태는 ‘좋은 곡선’을 이루고 있고, 일본 법륭사 소장의 <백제관음>은 ‘그것이 형태라기보다 오히려 흐르는 선’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선의 예술이 가장 현저한 조선의 도자기에는 ‘곡선에의 요구’가 그 심리에 깔려 있어 조선의 형태를 형성했는데, 류음수금柳陰水禽(버드나무 그늘 아래의 물새)과 운학雲鶴의 도자기 문양이, “길고 가늘게 흐르는 선으로써 무상無常이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마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한국 조형미의 특질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일본인 야나기의 기술은 당시의 한국 지성인들에게 큰 반응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나, 점차로 그의 이론에 대한 반론이 대두되었다. 고유섭은 다른 각도로 한국미를 규정하여 ‘구수한 맛’ 또는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하면서 착실한 학문적인 고찰로 한국미를 정리해갔다. 즉 고유섭은 야나기가 예증으로 삼은<사신도>는 한대漢代 화상석畵像石에서 흔히 보는 조형들이고 ‘그것이 공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 유현미를 살리기 위한 형식’이라고 보았고, 또 석굴암의 군상들이 당에서 전래된 형식이라기보다는 ‘현저히 인도풍의 영향’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전체 예술적 효과가 조각적이기보다는 회화적 수법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윤희순은 그의 『조선미술사연구』에서 한국 조형미의 반도적 풍토양식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선만의 미가 아니라 ‘선, 형, 색의 유기적인 조화’임을 밝히려 했다. 즉 “반도의 양量은 언제든지 형이나 질을 위한 통일 있는 조화로서의 양이다.…양만을 내세우거나 색만 치우치려 하지 않고 선, 형, 질의 유기적인 조화라 하겠다”고 기술했다. 조형미의 반도적인 성격이 비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반도인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미를 슬픔의 미라고 규정한 사람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도적인 양식에 대한 윤희순의 ‘유기적인 조화’라는 규정이 오히려 그리스와 이탈리아 미술에도 통용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윤희순은 “석굴암과 다보탑이 ‘다양성의 통일’의 미의 전형으로서 금강산의 정취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고, 고유섭은 빈켈만이 그리스 미술의 특성으로 지적했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라는 표현을 석굴암의 조형미에 붙여보았다. 실로 석굴암 정면에 자리 잡은 석가상의 풍만 엄숙하고 온화 자비한 표정이나 그 뒤에 정연하게 배열된 군상들과 조화에서 우리는 ‘다양성의 통일’ 내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미를 선에 의한 비애의 미라고 하는 규정은 특정한 몇몇 작품에 국한한다면 몰라도 모든 시대와 모든 분야의 한국 조형미에 적용시키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한국의 귀족예술은 약산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장인들로 이루어진 서민계급의 예술들은 굳세고 묵직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나 신라 조각, 고려 석탑, 조선의 자기나 목공예품에는 오히려 한국인의 굵은 의지가 있다. 선의 미를 현저히 나타내고 있다는 고려자기만 해도 그것은 슬픔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지평선 가까이 보이는 한국의 연두빛 하늘을 본 딴 것으로 고려 전기의 평화로운 정서의 상징으로 보아도 좋다. 고려자기의 형태는 송나라 자기의 육중한 양감은 무딘 선과는 달리 상쾌한 양감과 우아하고 청초한 맵시 등 전체의 균형과 조화가 제련된 구성으로 통일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류음수금가 운학의 문양이 슬픔의 선이라기보다는 백색으로 그려져 있어 청과 백의 대조로써 맑은 하늘 밑의 백성을 상징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자기는 그 형태와 색과 문양이 조화된 정서의 선율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양성의 통일’, 내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심감할 수 있다. 고려자기가 송의 월주요鉞州窯, 여요汝窯, 정요定窯를 본받으면서도 그것을 고려의 독창적인 창의로써 고려화했으므로 여러 형식의 ‘통일’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 중 뛰어난 작품들이 원의 병란으로 고종이 강화에 칩거하던 때 제작된 것임을 생각하면 정신의 ‘고요한 위대’를 느낄 수도 있다.  한반도가 강대국과 접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외침을 받아왔지만 한국은 어느 면에서 그 외침에 강하게 대항하여 자기를 지켰고, 인접된 여러 문화를 수입하여 종합하고 통일하려 했다. 즉 통일신라가 유불선을 종합하여 국민도國民道를 이루었고, 최수운이 이 삼교를 종합하여 천도교를 이루었던 것이다.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한반도의 풍토적인 성격이 다양성의 통일 즉 정제된 형, 청초한 색, 유려한 선의 ‘유기적인 통일’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