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전_점잖고 우아함 - 이원복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9-22    조회 : 5112
음전- 점잖고 우아함

  이 새하얀 백자에 끈이 없으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 이다. 접근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형태보다는 끈에 먼저 우리의 시선이 닿는다. 그렇다고 끝 무늬가 빈틈이나 ‘옥의 티’ 나아가 사족은 더욱 아니다. 흠이 없는 진주나 다이아몬드는 단연 고가이다. 어둠이 있어 빛은 더욱 빛나는 것, 해서 필요악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동병상련이란 용어가 옳을 것이다. 흠이 없는 인생, 상처가 없는 삶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찌 보면 인위적으로 흠을 만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글래서 고도의 두뇌 플레이일지도 모를 거친 필치의 짙은 갈색으로 그려 넣은 끈이다. 이 틈은 나와 전혀 무관한 대상에게서 그 아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게 한다.
  예쁜 꽃이나 나무에 먼저 눈길을 주듯 우리들 대부분은 전체보다는 부분을 먼저 보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나 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서로의 눈에 콩깍지가 씌움은 한 가지만이라도 장점이 있으면 이것만 바라보게 되어 상대방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아닌지,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러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예쁜 부분만 모으면 최고의 미인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컴퓨터로 합성이 용이해 어렵지 않게 증명된다.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듯’ 부분에 너무 집착하면 전체를 결코 알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완벽完璧은 인감됨인 인격뿐 아니라 일과 예술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러나 목표와 지향처가 지나치게 높고 멀 때 우리는 긴장과 숨 막힘 그리고 좌절과 절망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적당함 또한 완벽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완벽과 적당은 같은 얼굴의 두 모습인지도 모른다. 도달하기 불가능한 목표 설정은 그자체가 완벽에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최선을 다했는가는 도달한 성과로 목표에 앞서 목표의 설정부터 시작된다.
  중국이나 서양도 마찬가지로 도자기로 된 그릇의 이 빠진 것을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한다. 이는 도자기를 귀하게 여기거나 대범한 그들의 심성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음식점에서 금이 가거나 이 빠진 유리잔을 내놓으면 언짢아하고, 가정에도 이 빠진 유리잔을 내놓으면 언짢아하고, 가정에서도 이 빠진 그릇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릇이 만들어진 다음 사용할 때 함부로 다루어 흠을 냄을 용서치 않는 건 그릇에 대한 또 다른 애정의 발로인가. 

  제멋대로가 아닌, 가볍게 촐싹대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눈에 띄게 두드러져 보이진 않지만 정숙하고 단정한 행동거지를 지칭할 때 음전하다고 한다. 때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점잖을 빼는 어린이를 지칭할 때도 사용한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란 속담이 있다. 겉모양에 비해 내용이 훌륭하다는 의미이겠지만 이즈음 뚝배기에 대한 평가 또한 만만치 않다. ‘숨 쉬는 그릇’이니 ‘물이 썩지 않는 그릇’이니 해서 오지그릇에 대한 예찬이 나날이 높아간다. 여러 가지 김치를 비롯해 다양한 젓갈이며 여러 장류醬流등 발효식품의 발전에는 이들 오지그릇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뙤약볕에 그을린 청년 같은 질그릇의 투박하고 텁텁함, 꽉 막힌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서 빛을 덜 받은 식물처럼 백자의 다소 창백한 듯한 외모는 마치 농촌과 도심의 인물처럼 차별화되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이지적인 면을 찾기 힘들지만 수수한 옷차림에 순박하고 푸근한 느낌의 시골 아가씨에 비견된다. 흙물 든 옷차림의 건강한 농촌 청년과 하얀 와이셔츠의 세련된 정장 차림새인 도심의 젊은이 중 누가 더 멋있는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같지 않고 미의 기준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질그릇보다 청자가, 청자보다 백자가 더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발전 순서가 분명하다. 그러나 청자가 백자보다 덜 예쁘다는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투박함에 인간적인 따사로운 정이 짙을 수 있고, 해맑음은 가을 화창한 날씨의 명랑함이나 눈 온 날 눈부심과 상큼함처럼 서로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굳이 노자老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움이 기교를 이긴다. 각종 양념을 많이 사용한 음식보다 산채나물의 담백하면서도 상큼한 맛, 이젠 찾아보기 어려운 한여름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올린 물맛에나 비교될까.
  

  일직부터 우리나라는 도자왕국이었다. 고려청자며 분청사기와 백자 등 옛 도자기의 멋과 아름다움은 우리만이 아닌 전 세계 모든 사람들도 공감한다.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의 미술품 국제경매에서 조선백자가 비싼 가격에 낙찰된 소식들을 간간이 접하곤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중국에 비해 우리 도자기의 수적인 희귀성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전통미술의 전반이 그러하듯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이에 지구촌 사람들이 이를 차츰 인식하게 된 데에서 기인된 것이다.
  특히 도자기들은 쓰임새 있는 그릇들로 늘 생활 주변에 함께하여 선사시대 질그긋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8천 년에 이르는 민족의 미의식과 정서를 진솔하게 담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자기는 질그릇의 단계를 넘어 자기에 도달했을 때도 토기가 지닌 덕성을 견지한다. 완벽성과 기교의 극치로 경탄을 자아내는 중국 자기나 화사한 일본 자기처럼 첫눈에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첫 대면은 마치 화장기 전혀 없는 햐암, 손색시와의 만남처럼 덤덤하기만 하다.
  처음엔 전혀 운명적인 만남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이 가면 갈수록 그 만남의 횟수를 더해 가면 끝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젖어들게 된다. 그저 곱거나 예쁜 것과는 다른 너그러움과 수더분한 인격이 주는 믿음직스럽고 의젓한 그래서 여운이 길고 담담한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다. ‘말이나 행동이 곱고 점잖음’을 지칭하는 ‘음전’이 이에 적합한 단어로 생각된다. 이는 도자기에 그림이 아닌 우리 전통미술 전반에 해당되는 것이다.
  겨레의 글인 한글이 창제되고 화가 안견의 불후의 명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더불어 조선왕조 세종 이후 문화의 만개를 보여주듯 15세기 후반에 탄생한 <백자철화 끈무늬 병>은 술병이다. 철사 안료로 병목에서 시작해 굽에 이어지는 끈을 드리운 무늬의 착상은 놀랍기만 하다. 이런 무늬는 국내에 단 두 예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굽바닥 안에는 철사 안료로 쓴 ‘니히’ 한글 명문이 있어 흥미를 끈다. 이 도자기는 개인 소장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선뜻 기증해 박물관 조선백자실에 상설 전시되었고,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개최에 따른 문화축제인 ‘흙ㆍ혼ㆍ불:조선왕조 명품전’에 출품되어 한국의 멋, 그 음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는 이를 기쁘게 했다.
  이 백자가 보여주듯 튀지 않기에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으며 표피적이기에 경박한 찰나적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주면 담담하지만 깊은 맛, 은근하고 가볍지 않은 진중한 그래서 쉽게 변하지 않는 진중한 아름다움과 조우를 체험하게 된다.

이 글은 이원복,『홀로 나귀 타고 미술숲을 거닐다』(이가서, 2008)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