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향기_깨달음의 길을 간 얼굴 - 이원복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8-22    조회 : 4821
“뜻은 돈독하고 힘써 학문 익혔으며 매운 지조 꿋꿋이 닦으셨네
계율을 받들어 지니시니 깨끗하기 빙설과 같으셧네.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으셨고 강의하시던 모습은 한결 같으셨네.
석장을 짚고 온 세상 누비시니 맑은 바람 밝은 달이로다.
불초법자인 혜소가 울면서 쓰다.”

篤志力學 精修苦節
奉持戒律 淨如氷雪
脇不至席 講若畫一
錫還八垓 淸風明月
不肖法子 慧昭泣書 

   여러 점이 전해지는 화담華潭 경화敬和, 1786~1848 진영은 단정한 자세로 앉은 정면상이다. 조선시대 초상 중에는 <태조어진>을 비롯해 <윤두서자화상> 등 정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왼쪽이나 오른쪽 얼굴을 드러낸 7~8분상分像 등 약간의 측면 묘사가 정면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용이해 선호된다. 하관이 빠진 갸름한 얼굴, 예지가 깃든 날카로운 눈매, 경상에 불경을 펼친 모습의 선비나 학자풍의 체취까지 감지된다. 스님은 각기 다른 색조의 가사 장삼과 방석, 배경 처리, 불경의 표장 상태 등에서 구별됨을 보이지만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염주를 지니고, 목에 있는 삼도, 찬讚, 화면 왼쪽 세로 긴 직사각형으로 구획해 붉은색을 입힌 부분에 쓴 영제影題를 살피면 주인공 이름은 같지만 앞에 붙인 묵서는 다르다.
  이 가운데 김룡사 진영에는 앞에 소개한 찬이 있어 스님에 대한 접근이 보다 심도를 더한다. 화문석 자리 위 경상을 앞에 두고 흰 방석에 앉아 불경을 읽다 잠깐 얼굴을 든 모습이다. 길고 높고 긴 코는 심지가 깊음을 전해주는 대체로 학자풍을 보여준다. 대승사 진영은 짙은 흑갈색이 아닌 회색 승복에 가사나 죽장의 채색도 담채에 가깝고 나아가 배경의 녹색과 존호를 적는 왼쪽 이중 묵선으로 나타낸 세로 긴 존호를 넣는 부분도 분홍색을 입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옷 주름으로 입체감 부여를 준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안면과 손 등의 혈색 또한 좋다.

  조선 후기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속한 화담 경화 스님은 18세에 출가해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지향하고, 유불선 일원론의 사상을 지닌 동양 고전 전반에 두루 해박했다. 1815년부터 여러 강원 조실로 화엄대회를 주관하는 등 대중교화에 애쓴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동갑으로 양자의 교유를 시사하듯 표충사 진영에는 추사의 찬이 있으며 같은 내용인 ‘화담율사찬’이 김룡사에 목판으로 전한다. 추사의 찬 끝 구절은 “봉우리 등불은 꽃華을 토하고 산에 걸린 달은 못潭에 잠긴다奉燈吐華 嶽月印潭”로 존호를 담고 있다. 선승으로 진영이 동원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비롯해 김룡사, 대승사, 통도사, 표충사 등 알려진 것만도 5점에 이르는데, 이는 여러 사찰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심리 상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얼의 꼴’에서 유래된 것으로도 보는 얼굴이다. 마음 상태뿐만 아니라 건강상태 등 전통의학에서는 질병까지도 안면을 통해 살핀다. 잘생긴 것과 호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삶의 여정이 얼굴에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숨기기 어렵다. 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님이나 신부 등 성직자의 안면은 평화스럽고 잔잔하다. 수덕의 깊이와 수양의 정도가 비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들 외에 이름 없는 범부나 시골 아낙에서도 이에 뒤지지 않는 평온함을 엿보게도 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대부상에 비해 스님 초상인 진영에 있어 안면을 살펴보면 대체로 흰 편이다. 이는 안료와도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고승의 수양 정도를 투명하고 맑은 빛나는 모습으로 강조해 호분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희고 잘생긴 얼굴’을 백석白晳이라 하는데 흰 얼굴의 선호는 예나 오늘이 다를 바 없다 하겠다. 그러나 희다함은 창백한 것과는 다르고, 외모보다는 내면세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정신이 맑고 빛남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778년 정조의 어제가 있는 국보 제239호 외 여러 점이 전해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상 중에 여러 점을 남긴 예로 한 인물이지만 다르게 표현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아마도 같은 초본으로 제작해 같은 도상을 보이는 것으로 여기서 소개한 <화담당경화진영 華潭堂敬和眞影>을 들게 된다.
  사찰의 진영각眞影閣에는 문파 조사, 중창주 등 사찰에 업적이 두드러진 스님의 초상인 승상僧像을 모신다. 비록 후대에 이모한 것이나 일본 고신지高山寺에 소장된 15세기 옮겨 그린 <원효상元曉像>과 <의상상義湘像>, 1805년 도일道日에 의해 중수된 선암사에 소장된 <도선국사진영道詵國師眞影>과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 동화사의 <보조국사진영普照國師眞影>, 신륵사의 <무학국사진영無學國師眞影> 등 시대가 올라가는 스님들은 조선시대 일반 초상화가 그러하듯 이들 모두는 의자에 앉은 고식古式을 유지한 예들이다. 승상 또한 우리나라 초상에 있어 한 위치를 점한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것은 시대가 내려오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선사들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는 초상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히도 임금의 초상인 어진은 한국동란 때 잿더미로 화해 남은 예가 몇 안 된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인공 초상을 필두로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까지 이어지니 그 역사가 사뭇 오래다. 이들 어진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화원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이며, 김홍도나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 등이 그러하듯 화가의 위상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에는 건국 이래 28회에 걸친 공신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기리기 위한 시대별로 정형화된 초상 제작이 이루어졌다. 조촐한, 때론 그린 화가의 빈약한 솜씨 때문이기도 하겠으니 소박하기조차 하다. 그래서 굳게 자란 거목보다는 한 포기 이름 없는 풀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승상에 대한 첫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영은 나름대로 양식과 형식을 지닌 조선 초상화의 한 영역을 점한다.

 * 이 글은 이원복,『홀로 나귀 타고 미술숲을 거닐다』(이가서, 2008)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