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순례기5 (상원사)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5-05    조회 : 5004

上 院 寺

  이곳에서 상원사까지 30리라 한다. 월정사를 구경하고 나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월정사에서 얼마 안가서 부도군이 있었으나 모두 석종 형식으로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곳을 돌아서면 산은 그윽하여지고 골은 깊어 간다. 물소리는 청정하여지고 천석泉石은 청수淸秀하다. 영림회사營林會社의 벌목공장이 어지러우나 백안시하고 지나치면 삼백杉栢의 향기가 촉비觸鼻하고 황청篁靑이 서리속에 오히려 생생하다. 산새의 옥음玉音은 그야말로 은반에 구르고 정정한 벌 목소리 산곡에 반향한다. 한고비 두고비 도는 대로 막혔던 산이 다시 터지고 분격奔激한 냇물이 다시 막힌다. 한두 군데 벌부伐夫의 정한두옥井韓斗屋이 흩어져 있으나 귀기鬼氣가 싸고 돈다. 기암奇巖에서 산태山態을 그리고 괴목怪木에서 호랑虎狼을 환각幻覺하여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중에 일종의 골계미滑稽味와 미고소微苦笑를 느꼈다. 고독한 발섭跋渉에서 적요寂寥를 느낀 적도 이때이었고 일종의 선미禪味(야호선野狐禪이나마)를 느낀 적도 이때였다. 넘어진 통나무를 밟아 넘고 길 없는 암간岩間을 뚫고 지나는 맛이 인간의 행로난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이르러 금강산金剛山이 조각적 산수山水이었음을 회상하게 되었고 오대산이 회화적 산수임을 느끼게 되었다. 금강산은 외식外飾이 많고 오대산은 내은內隱이 중重하다. 금강산은 현기衒氣가 있고 오대산은 요조窈窕하다.

  중간 길에서 오대산 사고史庫를 올랐다. 단김에 올라 닿기는 힘들었다. 아늑한 골속마다 보일 듯 보일 듯 하였으나 마침내 봉산峰山 중턱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무인주처無人住處에 귀기가 싸고도는 퇴폐頹廢된 건물이 있을 뿐이다. 실록각實錄閣ㆍ선원각璿源閣이 각기 2층 누각으로 사고에만 이용된 형식이라 조선건물에선 드문 예에 속한다. 건물은 선조宣祖 39년의 소창所創이나 보략譜略은 대정大正 3년에 동경東京으로 옮겨갔다 한다. 혹은 산령山靈이 나오지 않을까 혹은 여우나 삵이 나오지 않을까 혹은 부시腐屍나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문을 열고 올라보았으나 아무것도 없는 빈 창고이었다. 이 옆에는 영루암靈樓庵과 빈 누각이 있었으나 한결같이 퇴폐하여 장벽墻壁이 흩어지고 동와棟瓦가 괴락壞落되어 있다. 병장屛嶂을 이룬 산정山頂에는 하얀 눈이 끼이고 먼 산은 안개 속에 파도쳐 보인다.

  상원사에 도착하였을 적에는 영시零時(자정)가 넘었다. 방한암선사方漢岩禪師에게 약왕보살藥王菩薩을 묻고 동진보안보살童眞普眼菩薩을 논論하고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의議하고 단종대왕端宗大王을 평評하였다. 선사禪師의 단종대왕의 평은 앙큼스러웠다는데 있다. 오찬午餐을 받고 다찬茶餐을 받았다. 속한俗漢이 차 맛을 알랴마는 유향幽香이 사랑스러웠다.

  상원사의 창대創代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월정사와 같은 시대의 것일 것이다. 월정사사적기에는 성덕왕聖德王 3년의 소창이라 하였다. ≪閔漬記≫에는 中臺眞如院 仍前所安泥像文殊置於後壁 又異黃地畫成一萬文殊並三十六形 亦以精衆五員 畫讀華嚴經大般若經夜念華嚴禮懺 號爲華嚴結社 以寶叱徒房改名爲華嚴寺 內安圓通像毘盧遮那三尊及大藏經 亦以精衆五員長年轉讀大藏經 夜念神衆 又趁年行事行百日華嚴會 號爲法輪結社 以爲五臺五社之本社  云云이라 하였다.

  전에 필자가 오대五臺의 전개를 만다라적曼茶羅的이라 하였음은 이러한 밀교적 요소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하고 상원사는 그 중심된 곳이다. 그러므로 진여원眞如院이라고도 한다. 지금 이 사찰에는 전거前擧한 신라의 화상畫像 장경藏經 원상圓像이 하나도 없다. 다만 신라시대 유물로는 전에 말한 종이 있을 뿐이다.  

  開元十三年乙丑正月八日鐘成記之都合鍮三千三百餘兩重普衆都唯乃孝□□歲道直衆僧忠七沖安貞應旦越有休大舍宅  夫人休道里德香舍上安舍照南乇匠仕□大舍 

 이러한 사두식史頭式 기록이 견상肩上에 모각毛刻되어 있다. 종의 형식은 예의 조선 특유형식인 용뉴龍鈕와 용甬의 합성인 종뉴鐘鈕가 있고 3x3=9의 유乳가 4면에 높이 달리고 보상화문寶相花文이 상하대와 유좌乳座를 둘려 있고 연화문당좌蓮花文撞座가 양면에 있고 주악제천奏樂諸天이 쌍쌍이 양면에 새겨 있다. 높이 5척 5촌, 구경口徑 3척의 소종小鐘이나 조선의 최고종最古鐘이다. 경주 봉덕사종도 크기는 하나 시대로는 이에 떨어진다.

   
  
  마당 앞에는 대리석 오중탑五重塔이 있다. 연대蓮臺 위에 기단基壇이 놓이고 기단 4면에는 비룡飛龍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 제1층에는 남면과 북면에 삼존불, 동면과 서면에 4존불, 제2층 이상 탑면에는 4면에 전부 삼존불이 새겨 있다. 석질石質은 좋지 못하나 요만한 소탑小塔에 다수多數한 불상을 조각한 것은 원각사탑圓覺寺塔의 계통을 받은 것이다. 물론 탑신 전면에 불상을 조각한 예로는 개성開城 현화사탑玄化寺塔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가 다르다. 그리고 원각사의 탑도 원래는 개성 경천사지擎天寺址에 있던 13층탑을 모방한 것으로 경천사탑은 원장元匠의 소조所造이나 조선의 탑파조각계塔婆彫刻界에 일신기一新機를 낸 것으로 원각사탑ㆍ상원사탑ㆍ신륵사탑ㆍ석등ㆍ개성 연경사파탑衍慶寺破塔 등이 다 그곳에서 연유한 것들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해인사海印寺 고려장판高麗藏版을 번인飜印하였다는 대장경궤大藏經櫃가 그득히 놓이고 정면에는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문수동자상이 소위 세조 9년대 작품으로 원안융비圓顔隆鼻와 장구위체長軀偉體가 이조李朝에도 이러한 조각이 있었던가 할 만큼 호감을 보이고 있다. 불상 앞의 3,4 소상小像과 동진보안보살(위태천신韋駄天神)의 좌상坐像도 비록 2척 내외의 소상들이나 온건한 작품이었다. 융비연함隆鼻燕頷의 도법刀法, 의복의 색채 등 공예적 수법을 멀리 떠나지 못하였으나 무한히 사랑스러운 작품들이었다. 불상의 대좌도 교치巧致가 한갓 흘러 있다. 항용恒用 이조의 불교적 작품이라면 평판平板하고 소대疎大하고 허장虛張된 것들만 있는 것이 관념화된 우리에게 이만한 작품이 남아 있음을 나는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오히려 한 기적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건대 이조의 불교 예술은 타락, 타락하여도 세조조의 융성은 실로 의외의 사실이었다. 경성 원각사의 탑과 비, 상원사의 이 불상이 그것을 증명한다. 양양 낙산사에도 같은 시대의 우수한 불상이 있음을 들었고 같은 절의 13층탑도 버릴 것이 아니다. 개념이란 것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인가를 이때에 비로소 절실히 느꼈다. 제일로 우스운 것은 절의 승려가 설명할 때 문수동자상은 세조대世祖代의 작作이요 문수보살상은 신라대新羅代 작품이라 한 것이다. 이는 마치 현해탄 건너편 어느 사승寺僧이「왼쪽은 운경運慶이요 오른쪽은 담경湛慶인데 홍법대사弘法大師의 작품이올시다」하는 것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인고 하니 운경 담경은 일본 겸창조鎌倉朝의 거비巨臂이요 홍법은 나양조奈良朝의 밀교의 대덕大德이다. 따라서 홍법과 운경과 사이에는 신라 초기와 고려 말기와 같은 수백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차를 무시하고 수백년 전 사람이 수백년 후의 조각을 하였다는 것이다. 상원사의 사승의 설명은 요컨대 이 법을 역용逆用하여 이조 중엽 이후의 작품을 신라까지 올린 것이다. 지금에 문수보살상은 월정사의 칠불七佛과 같은 형식이므로 보아 시대가 더 떨어진다. 이것을 신라대 작품이라 하면 병좌並座한 세조대 문수동자도 나와 같이 한번 웃었을 것이다.

  사승은 다시 적멸보궁에 가기를 권하였다. 그곳을 가면 곧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적멸도량寂滅道場은 시성정각처始成正覺處이니까 그럴싸하나「본래 무일물無一物한데 하처何處 유극락有極樂」고 하여 아류我流의 해석을 내리고 그만두었다. 더욱 적멸보궁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까닭에 상탑像塔을 두지 않고 주승住僧도 없다 한다. 다만 빈 도량이 있을 뿐이라 하므로 아주 나와는 인업因業이 먼 듯하여 그만두었다.

  이곳을 떠나서 월정교리月精橋里까지 내려오자니 50리라 한다.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오니 목적지에 도달할 때는 아직껏 겨울해가 넘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중간 점심 시켜 먹고 구경하고 약 두 시간 빼고 - 전후 80리 나의 걸음도 느린 편이 아니라고 자긍自矜하고 여숙旅宿에 누워서 석반夕飯을 주문하였더니 그제야 찬꺼리를 사러 간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 하였더니 30리 밖 장터로 갔다 오겠다는 것이다. 이 사람아 사람을 굶겨 죽이려오 하였더니, 아니요 잠깐 다녀오지요 한다. 하릴없이 그러라 하였더니 덕택에 저녁은 밤 열시 ! 성인聖人은 무몽無夢이라니 나도 성인 연然하게 꿈 없는 잠을 잤다.

  겨울의 여행은 항상 힘이 든다. 더욱이 기차가 없는 곳의 여행은 허왕허래虛往虛來하는 수가 많다. 월정교리에서 강릉 가는 차도 오후 6시나 되니 그곳에 도착할 때는 이미 어두워 구경할 수 없고 다음날 도로 나오자니 오전 6시나 7시에 출발하게 된다니 그 전에 또한 구경할 수 없다. 노중路中에서 하루 숙박에 하루, 전후 2일이 아니면 소기의 목적을 달할 수 없다. 절약의 절약을 하려는 나의 여비로써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여행이다. 대관령을 눈앞에 두고서도 넘지 못한 것이 한갓 유감이었으나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로 떨어지려 하였더니 그 역시 평창平昌ㆍ영월寧越의 길을 취하면 차로車路 외에 7, 80리의 소백산령小白山嶺을 발섭跋涉하게 되니 이것도 길에서만 3일 이상의 일정을 허비하게 된다. 이에 가장 유효한 행정行程은 원주原州로 다시 들어 그곳에 고적을 구경하고 충주忠州ㆍ청주淸州로 둘러 그곳의 고적을 구경하고 보은報恩 법주사法住寺로 하여 상주尙州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일자日字는 걸리고 우회는 되지만 돌아가는 길에라도 들려야 할 목적지이므로 나에게는 편하였다.

 

*이 글은 고유섭,『고유섭전집 2』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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