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순례기4 (월정사)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4-20    조회 : 5887

月 精 寺 

  하진부下珍富 월정교에서 하차할 때는 겨울날도 다 저문 오후 5시이었다. 그곳에서 월정사까지 20리라 한다. 기한飢寒이 심하나 갈 길은 가야 한다. 먼 산이 눈이 끼고 저녁 올빼미 소리가 음흉하게 산곡을 울린다. 검푸른 하늘에는 아직도 석조夕照가 남을 듯 말 듯 하였는데 언월偃月은 이미 높이 뜨고 별 하나 별 셋 반짝이기 시작한다. 울울鬱鬱한 송림 속에선 알지 못할 짐승의 소리가 나고 살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도 우렁차게 울린다. 폐천장림蔽天長林 속으로 기어들 때는 이미 사문에 도착된 때이다. 사역 석축을 끼고 돌 적에는 칠야漆夜에 보이는 것이 없었으나 사관寺觀의 속俗됨을 눈감고 느꼈다. 이날은 사전寺前의 승사속관僧舍俗館에서 일야一夜를 새웠다.

  익일 월정사 종무소에 들러 사적기를 구하였으나 책임자 출타로 보지 못하였다. 이곳에 역시 미술적으로 볼 만한 것은 대웅전 팔각구층탑, 탑전 석보살, 대웅전내 천수관음 등에 불과하였다. 종각의 종도 틀 따름이요 추앙할 작품이 아니었다.
  

  원래 이 오대산은 「國內名山, 此地最勝, 佛法長興之地」라는 상지자相地者의 감찰鑑札이 일찍부터 붙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첫째로 삼국말三國末 자장慈藏의 전설, 둘째로 통초統初의 효소왕孝昭王의 전설, 셋째로 고려의 신효의 전설 등은 일찍이 『삼국유사』에 올라 있다. 이제 일연一然의 소전所傳과 민지閔漬의 소기所記를 종합하면 정관 17년에 자장율사가 그 이전에 당唐에서 전래한 불사리를 중대中臺 지로봉地爐峰(지금의 적멸보궁)에 봉안하고 문수진신文殊眞身을 보려고 잠 시 결모結茅한 적이 있으니 이것이 지금의 월정의 초창이다. 따라서 지금의 석조 13층탑이 월정사기 기타에 전하는 바와 같이 자장의 조성이 아니었음을 우선 벽파劈破하여 둔다. 다음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태자太子의 래주來住의 전설로부터 비로소 오대五臺의 오대다운 진전을 보게 된 듯하다. 동대東臺에 아축阿閦과 관세음, 남대南臺에 팔보살과 지장, 서대西臺에 무량수無量壽와 대세지, 북대北臺에 석가과 미륵과 나한, 중대中臺에 비로와 문수 등 만다나적曼茶羅的 전개는 이 전설이 일연이 설파한 바와 같이 효소왕대 이후의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리하여 이 오대를 중심하여 무수한 원상圓像과 화폭畵幅과 장경藏經이 안치되었으니 실로 당대에는 신라예술의 무량보고無量寶庫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을 실질적으로 방증하는 것으로 성덕왕 24년의 명기가 있는 신라종이 상원사에 남아 있다. 조선에선 최고의 불종이다. 그러나 월정사에는 당대의 아무런 상설像設이 없다. 이제 다시 효신거사의 전설을 보면 불가 특유의 황설荒設 고사시姑捨是하고『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우선 「居士高麗時公州人也」라는 것이 주목 된다. 그리고 「於是寺, 有五尊像, 最爲奇妙 庭中有八面十三重石塔, 內安世尊舍利三十七枚, 而塔前有樂王菩薩石像  手捧香爐, 向塔而踞 古老相傳云, 是石像, 從寺南金剛淵而湧出, 塔亦製作甚妙, 罕有其比, 而又多靈異, 只今山中烏雀不敢飛過其上, 爲衆靈所衛, 可知也」라 하였다. 이곳에는 탑상의 연대 문제와 신효전설과 사이에 하등의 교섭이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있는 바와 같이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陁來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有綠來住而漸成大寺」란 것은 탑상 년대에 대하여 다소간 지시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이 전설이 충렬왕 이전의 것이요 신효 이후의 확장 사실이 고려 이후의 것이라면 탑상의 연대도 저간這間에 있음이 확실하다. 탑 자신의 형식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물론 소전의 오존상은 남아 있지 않고 본당 내 칠불도 모두 이조의 것이므로 문제 되지 않는다. 탑의 형식에서 억측을 내리자면 정종靖宗 11년의 소작인 경성 홍제원 오중탑과 비등한 점에서 「水多寺長老有綠來住而漸成大寺」란 사실이 차간此間에 있을 듯하다.

  탑은 현 높이 50척으로 단아한 점에서 평양 영명사의 팔각오중탑에 못지않고 청명한 점에서 원평양元平壤 율리사지栗里寺址에 있던(현재 동경대창집고관東京大倉集古館) 팔각오중석탑에 못지않으나 기단 연화 조각만은 이상 두 작품에 비하여 떨어진다.
  
그러나 웅위장대한 점에서 차종탑파此種塔婆중 백미라 하겠다. 원래 이러한 다각탑은 중국에서도 오대五代 이후 송•원부터 특히 유행되기 시작한 형식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고려조부터 유행되기 시작한 것이니 현저한 예를 들면 전거한 것 외에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의 육각다층탑六角多層塔, 평양平壤 대동문측大同門側 육각칠층탑六角七層塔(원광사탑금이재평박元廣寺塔今移在平博) 평양 광법사廣法寺의 팔각오중탑, 영변寧邊 普賢寺普賢寺의 팔각십삼층탑八角十三層塔(이것은 이조 작품) 등이다. 이것이 금일까지에 알려진 다각탑이니 그 수數 비록 전후 7기基에 지나지 않고 지방적 분포 비례로 열면 강원 평창에 1, 전라 김제에 1, 평안도에 1의 솔率이다. 이로써 보면 보선의 차종다각탑此種多角塔은 북방 새외적塞外的요소라 함은 각형角形보다도 원형圓形에 대한 애호의욕愛好意欲을 말함이니 고구려의 형식감도 이 원형애호가 우수하였던 듯하다. 하여간 고려 초기에 이와 같이 다각형식이 성행되었음은 신라 초두에 와탑형식이 성행되었음과 비교하여 각 시대에 영향된 문화계통의 종래 파별派別을 보는 것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월정사탑에서 특수한 점을 느낀다면 우선 기단의 殊異點에 있다. 즉 기단 하부에 각면 양구兩區의 안상대석이 들어앉은 것이 그 하나이다. 기단 밑에 이와 같이 안상대석이 놓여 있는 것은 보통 있는 수법이나 그러나 이탑은 13층의 고탑이요 더욱이 기단 이상의 수축률과 안정감에 있어 성공된 조화를 보이고 있음에 불구하고 조화되지 않는 대소 불정不整의 여벌이 들어앉은 까닭에 기부에서 파조破調를 내었다. 이것이 이 탑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러나 이 탑의 가치를 살리고 있는 것은 기단 이상의 수법이다. 옥석屋石과 밑받침의 웅위한 조법彫法과 각층 옥석에 줄줄 달린 풍탁의 조화, 노반 이상 상륜의 완존完存 등, 물론 이 상륜은 후대(이조)의 보작補作이나 탑의 조화를 잘 살리고 있다. 상륜을 장식한 철제품은 일견 금강산 유첩사楡帖寺의 탑의 상륜의 것과 같다. 이 가람이 이조 헌종대황시 중수한 것인 즉 당대의 조형이 아닌가 한다. 탑전에는 높이 6척 가량의 약왕藥王보살이라는 석상이 있다. 기記에는 수봉향로라 하였으나 지금은 파손되어 알 수 없다. 풍요한 양협兩頰과 청수淸瘦한 봉안鳳眼이 특히 주목되나 체중이 약소하고 관여두冠與頭가 과대하여 전체로는 이상한 궤약미跪弱味를 내었다. 그러나 탑과 동대同坮의 려초麗初의 작품인 만큼 온아한 맛이 그지없다. 원래 탑전에 약왕보살을 배치한 예로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자탑과 그것을 모방한 금강산 금장동의 사자탑과 평양 광법사의 팔각오중탑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떠한 경설經說에 소거所據한 것이며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가는 필자가 고심하나 지금껏 해득하지 못하고 있다. 상원사 방한암선사方漢岩禪師에게 질의하였으나 그 역시 명답을 얻지 못하였다. 선사는 오히려 이것을 동진보안보살童眞普眼菩薩로 해석하려 하였으나 그 역시 이 보살이 불법을 옹호하는 특이한 신력이 있는데서 설명하려 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약왕보살이라 함은 민지기閔漬記 등 고기古記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필자는 선사의 설에 곧 찬성할 수가 없었다. 선학先學의 판석判釋을 얻고자 하는 바이다.

  현재의 목조건물들은 사적기에 의하면 순조 33년에 소실되고 헌종 8년 이후에 중건한 것으로 미술적으로 볼 만한 칠불보전七佛寶殿은 同15년에 중건된 것이다. 전체로 웅위한 감이 있으나 두공포작斗栱包作은 역시 섬약纖弱하다. 다만 연화蓮花•봉용鳳龍 등 악취미惡趣味의 장식이 앙두昻頭에 없었음이 기특奇特하였다. 또 문호 위에 횡령横欞이 경영된 것은 하마터면 단조화單調化될 뻔한 전면을 잘 살리고 있다. 글러나 내부에 들어가선 이렇다 할 만한 경영이 없다. 불상佛像•화정畵幀 등도 현휘衒輝에 그치고 보잘 것이 없으나 척여尺餘의 천수관음상이 눈에 띌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라마불喇嘛佛이요 조선의 소작所作이 아니므로 약略하여 둔다.

*이 글은 고유섭,『고유섭전집 2』에서 발췌했습니다.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