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순례기3 (신륵사)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4-07    조회 : 4641

* 1에서 계속

神 勒 寺

  다음에 오랜 유물로 유명한 것은 오중벽탑五重甓塔이다. 관야정關野貞박사는 신라통일초의 작품이라 하였고 금서용今西龍박사는 고려말의 작품이라 하였다. 이 양설간에는 근 천년의 간격이 있다. 그런데 현재의 탑은 이조 영조 2년에 僧英淳•法密 등이 중수한 것으로 원래 형식은 이미 파괴되었은즉 형식에서 창립연대를 찾을 순 없다. 또 지금 탑 옆에 있는 중수비에도 「舊有塼塔鎭其嶺, 相傳爲懶翁塔, 見於挹翠諸賢語者, 亦可訂矣」라 하였음과 같이 懶翁내지 나옹시대의 탑은 아니다.
  
이것을 나옹탑이라 한 것은 중수비에도 있는 바와 같이 나옹을 다비茶毘한 곳이 이 탑전이었고 또 그 사리를 북애석종北厓石鍾에 두었으나 여회餘灰를 다비한 장소에 별탑을 세워 존치하게 하였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암두의 3층석탑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나옹탑이요 전탑은 나옹이 아닌데 원래 나옹이 거사이었던 만큼 그에 대한 추앙이 조그마한 이 삼중탑을 멸시하고 거대한 오중전탑으로 옮기게 된 듯하다. 따라서 금서今西박사가 속전俗傳에 의하여 곧 나옹탑이라 한 것은 오류이고 다만 벽면甓面에 양각부조된 보상화문이 신라형식을 갖고 있으나 신라대 소작所作으로 보기에는 수법이 부족하다는 의견만은 경청할 여지가 있다. 따라서 관야정박사가 문양수법의 유려한 점에서 곧 신라 초두初頭의 작품이라 한 것도 일단 의심할 여지가 있는 추정이다. 물론 씨氏에게는 현재 소전에 남아 있는 벽탑이 모두 나초羅初의 작품임에서 이것도 그리 추정한 듯싶으나 그러나 여대麗代에도 벽탑의 경영經營이 없었음이 아니다. 예컨대 금천衿川 안양사安養寺에도 고려 태조의 소건所建이라는 7층벽탑이 있었다. 이숭인기李崇仁記에는 그 장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벽탑이라면 곧 나초로 가져가려지는 관야씨의 태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현사지現寺址에는 나대의 유구를 방증할 만한 유물은 하나도 없고 곳곳에 여대 유물만이 많음도 이 탑을 곧 나대소작으로 간주하기 곤란하다. 오히려 지금 남아 있는 유물 중 가장 오랜 것으론 모두 여대의 작품인 중 특히 곳곳에 산재된 여대의 초석은 그 웅위장려雄偉莊麗한 품이 여말로 떨어질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金柄冀重修記에 「神勒之爲寺剏自麗代」란 것이 비록 속전에 지나지 못할 것이로되 다분多分의 진리가 있고 여초의 벽탑으로 금천 안정사탑이 지리적으로 이 신륵사에 가까우므로 보아 이 신륵탑도 여초의 작作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안정사의 탑이란 것이 잔존되어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형식비교를 못함이 유감이다. (글 유벽遺甓들이 지금 국립박물관에 있다.) 다음에 기록에 남은 이 사찰의 보물을 들면 현릉이 유벽遺甓와 발鉢과 불拂을 하사하였음이 그 하나요〔安心寺石鍾碑〕나옹이 입적 후 곧〔禑王 5년〕진당眞堂을 경영하였으니 고려대의 초상화가 하나 이곳에 있음직하고 우왕 8년에 목은牧隱이 경률론經律論을 인출하여 이곳에 2층 각閣을 지어 납입納入하였고 다음해 9년에 화산비로사나불花山毘盧舍那佛 1 구軀와 보현普賢 1구〔唐城君洪義龍所造〕와 문주文珠 1구〔順城翁主王氏與姜大人所造〕를 안치함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고려조 보물이 하나라도 남아 있음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였다. 다만 이곳에 나옹의 진당이란 것이 남아 있다. 즉 지금의 조사당祖師堂 안에는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3사師의 화상이 있으나 하등 고치高致를 갖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색채의 생소함이 모본模本인 듯하나 대개의 형식은 장단長湍 화장사華藏寺에 있는 화본畫本과 근사하다.

  신륵사는 이와 같이 나옹•목은으로 말미암아 여말부터 유명하여진 사찰이다. 그러나 다시 이조에 들어와서 또 유명하여졌으니 그는 광주廣州에 있던 세종의 릉을 예종 원년에 여주로 봉천奉遷하고 한명회韓明澮•한계희韓繼禧로 하여금 영릉英陵의 천복薦福을 위하여 침원寢園에서 머지않은 곳에 치사置寺할 것을 하명한 바 있었다. 금수온기金守溫記에는 봉천하기 전에 세조대왕이 세종대왕을 몽알夢謁하고 박감익절迫感益切한 바 있어 영릉 곁에 조포사造泡寺를 지으려 하여 벌재류부伐材流桴한 사실까지 있었으나 적우강안積于江岸한 것이 일석요창一夕潦漲으로 진위광도소일盡爲狂濤所逸한 바 되어 일시 중절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 천변天變에 대하여 풍수설에 의한 비설匪說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주로 봉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조의 유지를 받아 예종이 계승 경영하게 된 것이다. 그때 한명회계韓明澮啓에는 「陵室坐地之內, 無可立宇之地, 神勒一寺一名甓寺, 古賢遊賞之迹宛然, 且去先王瑩域甚邇, 鍾고皷之聲可達 若卽而修之, 則因舊爲 新事半功倍, 莫此爲便」이란 이유 아래에서 성종 3년부터 개창하게 되었으니 당시의 제조提調는 한명회•한계희 두 사람이었고 이신효李愼孝•김춘향金春鄕•이효지李孝智 등이 감역監役이 되어 동년 10월에 낙성落成하였다. 이리하여 보은報恩이란 사액賜額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조의 국찰로서 일약 중요한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유구는 지금 찾을 수 없다. 다만 추정할 수 있다면 조사당과 대웅전 앞의 대리석 칠중탑이다. 탑은 이성二成 기단의 백대리석제로 제 1기단 4면에는 파문波紋을 새기고 제 2기단 4면에는 비룡을 새기고 앙련, 복련을 아래위로 돌려 새겼다. 옥판석에도 연판를 섬세하게 돌려 새겼다.
  
그 모든 수법이 경성 원각사 대리석탑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형태는 다소 둔중하나 조각미는 칭송할 만한 작품이다. 다만 사우전각四隅轉角이 괴락 되고 노반 이상이 결락된 것은 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8층대에 가서도 탑신과 옥개 형식이 남아 있으므로 관야박사는 13층탑이었으리라고 추정하였으나 수축솔收縮率에서 상상하건대 9층탑이라 함이 가할 듯하다. 또 조사당 건물에 대하여서도 관야씨는 효종 원년의 작품으로 기록하였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효종원간엔 계획뿐이었고 성종 3년에 경영한 것인 즉 그 이후의 작품이라 함이 가할 것이다. 씨氏의 기술은 소홀하였다 할 것이다. 원래 신륵사의 목조건물은 여러 번 개수중창을 입었다. 이조에 들어와서 성종 3년의 중창이 그 첫째요 동대중수비東臺重修碑에는 전구가 결락이 되어 확실하지 못하나 영조 2년 이전에 승僧 덕륜德倫•탁연琢璉 등으로 말미암아 개창중수되기 전에 「成化萬曆再煩官修」라 하였으니까 그 전에 한번 중창이 있었음을 알겠고 또「中經兵燹, 蕩失舊觀, 後有戒軒師者, 訴諸朝, 再受位田, 繼復大莊」운운云云이라 하였으니 만력萬曆 후 영조 2년 전까지 또 한번 중수가 있었음을 알겠으며「今倫也以其嗣偕法 侶克率乃事」라 하였으니 덕륜의 개창이 영조 2년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음을 알 것이다.

 중수개창은 이뿐이 아니라 金炳冀의 중수기에 의하면 그의 선조 文忠公이 수즙修葺한 일이 있고 그의 족증조族曾祖 의정공이 수치修治 후 110년이라 하였으니 무오년을 철종 9년으로 볼 수 있으므로 정정공의 수치는 영조 24, 5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건축미술상으로 주목할 자는 전거前擧한 조사당과 대웅전이다 조사당은 이미 성종 3년 이후의 건물이라 하였으니 성종 14년의 건물인 경성 창경궁의 홍화문•명정문 등의 두공斗栱 권비卷鼻 등에 비하여 떨어질뿐더러 만력년간의 제작이라는 경성 문묘, 대구 문묘 등의 권비형식과도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인조조仁祖朝의 작품이라는 전등사•쌍계사•화엄사 등의 제작보다는 고치가 있다. 그러므로 연대는 이 중간에 있지 아니한가 한다. 연대는 하여간 우수환 작품이다 대웅전은 철종년간의 작품이라 함이 가할 듯하여 퇴화된 형식이 너무나 많다. 대웅전 내의 제작도 별로 볼 것이 업으나 천개天蓋의 반룡蟠龍, 본존本尊의 연화좌 및 불단의 조각만은 고치있는 작품이었고 그 중에 연화좌가 더욱이 고치가 많아 제작보다 오랜 유구 같았다.


 

*이 글은 고유섭,『우리의 미술과 공예』에서 발췌했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