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순례기2 (신륵사)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3-23    조회 : 4267

 * 1에서 계속

神 勒 寺

  이곳을 넘어서면 동북강두東北江頭에 신륵사가 보인다. 나루를 건너자면 장강長江의 석조夕潮와 원포遠浦의 귀범歸帆 등 조선에도 한시漢詩의 존립 가능성을 긍정하게 하는 풍치였다.

  신륵사의 소창년대所創年代에 대하여 확실한 전기가 없다. 금수온기金守溫記에는 「昔玄陵王師懶翁 韓山牧隱李公二人 相繼來遊由是寺遂爲畿左名刹」이라 하였을 뿐이다. 금병익중수기金炳翼重修記에도 「神勒之爲寺 剏自麗代懶翁之所佳錫 白雲之所留詩 又有牧隱諸賢之所題記 穹塔荒碑 錯落離立於寒烟古木之間者 如其古也」라 하였다. 신륵사란 기명記名이 보이는 최고문헌은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先覺王師碑인 듯하다. 그곳에는 나옹선사가 공민왕 21년에 지공指空의 유촉을 받아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고 이주하고자 하였으나 상명上命(우왕禑王)이 형원사瑩原寺에 이르기전에 병세가 급하여졌으므로 중로中路에서 배송관陪送官에게 핑계하고 여흥 신륵사에 잠유暫留하여 치병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그곳에서 입적하고 말았다. 회암사를 떠나 신륵사에 입멸하기까지 전후 월여月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면 신륵사가 나옹으로 알미암아 유명하여졌을지언정 하등 중창은 입은 바 없다. 그러나 나옹이 이곳에서 입적한 까닭에 사리탑이 오늘날 이곳에 남게 되었다. 13척尺 4지至의 기단에는 3면에 석보층단石步層段이 놓이고 기단 중앙에 높이 5척여의 석종이 놓여 있다. 하등 기교를 갖지 안하였으나 고치古致가 있다. 원래 이러한 석종 형식의 부도가 조선에서 시작되기는 통도사 계단이 처음인 듯하다. 《삼국유사》에「壇有二級 上級之中安石蓋 如覆鑊」이라 한 것이 그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장율사慈藏律師시대의 형식인지는 의문이나 예컨대 자장율사의 탑이라는 구례 화엄사의 사자탑도 경덕왕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전설만 가지고는 시대를 결정할 수 없다. 구례 화엄사의 탑은 이와 같이 자장율사의 탑이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록기조사綠起祖師(이 역시 시대불명의 인물이다.)의 탑이라 하여 전설만으로는 갈피를 찾을 수 없다. 하여간에 현재 남은 통도사의 계단은 여러 번 개수改修를 입은 것이니 《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초麗初에 한번 건드린 흔적이 있고 고종대에는 장군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경석庚碩이 사리를 꺼내어 경도京都로 옮겨간 기록이 있다. 또 이조李朝 숙묘대肅廟代에는 승僧 성능聖能이 개축하였다. 필자는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관야정關野貞박사가 한국건축조사보고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이성기단二成基壇인 하단 4면에 불상을 조각하고 4우隅에 수호신이 있고 기타 여러 경영이 있으나 조각수법이 도저히 당초의 것이 아니고 이 숙묘肅廟 개수대改修代의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석종 형식이 일찍부터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후 뚝 떨어져 소위 후백제시대의 조성이라 칭하는(나는 이것을 고려초의 작품으로 보려하지만) 김제 금산사金山寺의 부도가 있다. 이것은 기교가 심한 것으로 기단 전면에는 천인天人이 부각浮刻되고 반석 4우에는 귀면이 양각되고 종근種根 주위에는 연판蓮瓣이 부각되고 석종 경부頸部에는 용수龍首가 수개數介 원각圓刻되어 있었다. 그 석종 기단을 둘러 호신입상護身立像이 수구數軀 나열했고 석종 전면에는 오중석탑이 놓여 있었다. 그 기단 부조형식은 일견 은진恩津 관탁사灌濁寺의 미륵석불전彌勒石佛前 석단과 같다. 물론 이 석단도 건륭경신(영조 16년)에 개축한 것인즉 고려조의 作이라 하기 어려울는지 모르겠으나 대체의 수법이 당초의 것인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금산사의 석종도 후백제의 작품이라기보다 고려조에 들어와서의 작품으로 보려 하였다.

  그 후 이 석종을 모방한 것으로 장단長湍 불일사지佛日寺址에 하나 있다. 역시 2층 석폐石陛 위에 연화좌대蓮花座臺가 놓이고 그 위에 석종이 놓여 있으며 반개석盤蓋石에는 용수龍首가 성형팔출星形八出로 원각되어 있다. 그리하고 제 1단 석폐 4우에는 사천왕입상이 나열되어 있다. 이 불일사는 고려 광종년의 소창이지만 석종은 시대가 떨어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석종 형식이 여초麗初부터 하나 둘 없어졌음이 아니지마는 조선에 있어서 보편되기는 여말麗末의 지공指空•나옹懶翁 등으로 말미암아서인 듯하다. 이때에는 회암사•화엄사•신륵사•안심사 등이 지공탑•나옹탑을 위시하여 태고사太古寺의 보우석종普愚石鐘, 사나사舍那寺의 원증석종圓證石鐘 등 이조李朝에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성행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나옹탑이 새로운 형식의 계기는 아닐지언정 그 보편화의 역점을 이룬 곳에 중요성이 있다하겠다.

  석종은 비록 간단하나 그 앞에 놓인 석등이 자랑스러운 작품이다. 원래 부도 앞에 석등이 놓인 것은 그리 흔한 예가 아니다.
  
통도사 계단쯤이 그 동례同例라 할 것이다. 분농 墳隴 앞에는 소위 장명등이 놓인다. 그러나 분묘 앞의 석등이 여말 이후의 형식인 듯싶은 점에서 그 유래가 이 부도배치법에서 연유한 듯하며 이 부도 앞의 석등배치는 나대羅代 이후 불탑 앞에 석등을 배치하는 대로 돌아갈 것 같다. 예컨대 구례 화엄사 사자탑전 석등,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등의 삼중석탑전三重石塔前의 석등 등 이것을 다시 소구溯究하면 불전 앞에 서등배치법까지 볼 수 있다. 하여간 간단한 이 부도 앞에 놓인 석등은 유례없는 특수한 작품이다. 항예恒例의 신라식과는 전연 다른 것으로 앙련仰蓮, 복련伏蓮을 상하로 돌려새긴 화강대석花崗臺石 중간에 연주형단주蓮珠形短柱를 8릉稜에 돌리고 각란各欄 에 화문안상花紋眼象을 아름거린 것이 기단이다. 등신燈身은 회색대리석으로 이것도 8각인데 원주圓柱에는 비룡飛龍이 반항盤恒하고 각면에는 살산薩珊 계통의 완곡선을 그린 통창通窓이 뚫려 있고 그 위에는 비천이 고육부조高肉浮彫로 부각浮刻되어 있다. 면모面貌는 거의 다 파손되었으나 서면西面 2체體만은 완전히 남아 있다. 기단조각이 판각됨에 비하여 등신燈身의 조각이 유려함은 이 석등의 가치를 살리고 있다. 등신 위에 놓인 화강암 연엽형반개蓮葉形盤蓋는 순박하나 전체를 잘 통합하였고 최정最頂의 보주도 간략하나 맛있게 되었다.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박사가 이 석등에서 인도印度 회교계回敎系의 영향을 봄은 可하나 그러나 이 예술수법의 전래를 지공指空에 두고자 한 것은 오론誤論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지공래도指空來到 이전인 선종 2년의 작품인 원주 법천사지에 있던(현재 경성 국립박물관)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도 이 회교계의 형식을 다분히 발휘하고 있는 까닭이다. 회교계 수법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실로 오래 이전이다.

  다시 부도 옆에는 이색찬李穡撰 한수서韓脩書 이인린각李仁厸刻의 석종비石鐘碑가 있다.
  
이 비도 려말 당시에 비로소 유행되기 시작한 형식이니 화강석으로 기대基臺와 윤액輪額을 짜고 대리석판을 끼워 비碑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이 신륵사의 석종비 이외에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고 묘향산 안심사에 지공•나옹 사리석종비가 있고 양평 사나사에 원증국사圓證國師 석종비가 있고 조금 형식이 다르나 동일계통의 것으로 개성 공민왕 현릉에 하나 있다. 그러나 신륵사의 이 석종비가 차종此鍾형식의 가장 완성된 것으로 기단에는 앙련•복련과 안상난순眼象欄楯이 유려히 부각되어 있고 옥개에는 두공포작斗栱包作이 충실히 모각되어 있다. 연대로 보더라도 이것이 신우辛禑 5년의 작作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요 대장각기비는 신우 9년, 안심사비는 신우 10년, 사나사비舍那寺碑는 신우 12년, 다만 현릉비만이 신우 3년의 작作이나 형식이 조금 다르므로 제외한다면 모두 신륵사비보다 후대것으로 그것을 퇴화적頽化的으로 모방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이 비에는 부도•석등•석비 등의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음과 공인工人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은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라 하겠으니 비문각수碑文刻手 이인린李仁厸 석종수좌石鐘首座 각신覺信 각여覺如 일행一行 각회覺恢 지희志希 각숭覺崇 지신志信 지흥志興 석수石手 지명智明 금말을지金末乙只 등이 그라 하겠다.


 

*이 글은 고유섭,『고유섭전집 2』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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