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순례기1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3-06    조회 : 3988

寺蹟巡禮記

  「허다한 세기란 시간 저편에서 고대의 참다운 자태는 격리하여져 버리고 도처에 교수敎授들이 희랍希臘이 서리어져 있는 까닭에  희랍에서 희랍을 찾지 못 하였다는 것은  모리스 바레스」의 한탄이었다 한다. 이것이 한갓 희랍만의 운명이 아니었음을 나는 느낀다. 

 문화와 생활과 사이에 세기라는 시간이 들어앉아 간격과 층단層段을 내고 있음은 슬퍼할 일이다. 동일민족의 문화와 동일민족의 생활이 부합되지 아니하고  교수들의 문화 만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문화의 비극이요 생활의 참경慘境이다. 실로 개탄할 일의 하나이다. 그러나 倒回復의 꿈일진대 「교수敎授의 조선朝鮮」이나마 그려봄이 뜻없는 일이라 못할 것 같다. 이곳에 1933년도 다간 12월 하순에 「교수들의 조선」을 편역한 의미를 발견한다.

  기차는 남행하여 수원역두水原驛頭에 다다랐다. 나는 정거장 건물에서 순진한 조선을 발견하기 전에 견강부회牽强附會된 조선을 발견하였다. 이는 하필 수원역뿐이 아니다. 서평양역西平壤驛도 그러하고 경주역도 그러하다. 개성박물관 건물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수의 조박적糟粕的 존재는 문제하지 말자. 교수의 조선은 경편차輕便車가 본 수원역두로 돌아들적 홀연히 바라보이는 수원 남성문南城門에 있다.
  원래 이 수원성은 정조正祖 18년에 기공되기 전에 비록 퇴폐 廢는 되었을지언정 周 4,035척尺의 토성으로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정조가 개수신축改修新築하게 된 것은 수원이 경성의 중진일 뿐더러 현륭원顯隆園이 생긴 이래 수원이 별도의 의미를 갖게 되어 행궁의 경영까지 보게 된 것이 기인이었다 할 것이다. 임진역壬辰役 이래 조선은 퇴폐의 일로로 낙뢰落磊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영 정조 양대兩代는 비록 미미하나마 중흥의 기세가 있었던 때이다. 이러한 기세를 받고 다시 비극의 주인공 정조황고正祖皇考의 명복을 위한 수능조사修陵造寺(융릉隆陵 및 용주사龍珠寺)의 행사와 전후하여 경영된 것이라 그 조영造營의 최외崔嵬함과 배치配置의 미묘함과 경개景慨의 우수함이 성곽미의 집대성을 이룬 것이라 하겠다. 관야정關野貞박사의 평가를 들면 「그 제도가 종래 것에 비하여 달리 신기축新機軸을 지낸 것으로서 지나支那의 성곽에서 탈화脫化하여 그 시설이 다시 일두지一頭地를 빼내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장엄한 조영도 세세년년歲歲年年히 퇴폐되어 가지만 팔달문八達門, 장안성長安門의 ㅇㅗㅇ성甕城, 노대弩臺, 봉화대烽火臺, 공심곽空心 , 암문暗門의 배치配置, 화홍문華虹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승경勝景 등 한갓 필자만이 사랑하는 조형이 아니다. 더욱이 이 성역城役에 대하여는 당대의 전후 사실을 기록성책記錄成冊한《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3권서卷書가 있어 이러한 건축공예에 관한 기록이 적은 조선에 있어서는 저 송宋 이명중李明仲의 《영조법식營造法式》의 귀중함과 비할 만한 것도 잊지 못할 일이다. 
 물론 이러한 고증考證은 차중車中의 산물이 아니지만 차중경물에서 이장異狀과 진취를 느끼지 못한 나는 항상 이러한 괴벽스러운 서술로 흐르게 된다. 이것이 나의 여행귀의 악취미이나 그러나「교수의 조선」을 찾아다니는 나의 여행으로선 면하지 못할 특성이다. 따라서 경편차輕便車가 여주驪州어구에 다다를 때도 눈에 선뜻 뜨이는 것은 남편南便에 커다란 비각이요 북편北便의 문묘건물文廟建物이다. 조선의 풍물은 소조蕭條하고 민가는 왜소할지언정 이러한 건물만은 도처에 장엄壯嚴( )한 까닭이다.

 

三重塔

  여주읍에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랜 古蹟은 고려조의 작품인 삼중석탑三重石塔 2기基와 파불破佛 1구軀인 듯싶다. 그러나 그 중에 볼 만한 것은 읍서북邑西北의 맥전麥田중에 있는 삼중탑이다. 노반露盤 이상이 결락缺落되고 기단 일부가 파괴되어 약간 경사를 갖고 있으나 현 높이 9척의 아취있는 작품이었다. 보존할 만한 작품인데 기단이 파괴된 것은 왕왕이 탑중塔中의 사리보舍利寶를 절취 取하려는 소위에서 생기는 것이 그 하나이니 원래 기단에는 차종此種 사리舍利 두는 법이 아니다. 또 하나는 살만적薩滿的 기불행사祈 行事를 이 불탑 기단 속에서 하는 풍습이 있어 기단의 일부를 파괴하는 수도 있다 한다. 그러나 어느 편으로든지간에 결국은 무지無知의 파괴만이 남게 된다.
  이 탑에서 북변北便 수간보數間步에 커다란 사원이 보인다. 더욱이 임강臨江하여 경영된 것인 만큼 풍치가 없지 않다. 이것이 곧 대노사원大老祠院(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니 비각이 엄연히 보이나 모두 토취土臭가 분분한 건물이다. 원래 조선의 건물이 대개 다 그러하지만――――.

 읍동邑東에는 커다란 누각이 보인다. 지금은 무어라 하는지 모르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일찍이 서하西河 임원준任元濬이 사우당四友堂을 세웠던 유지遺址라 한다. 건물은 근년의 신구新構로 별로 볼 것이 없다. 서거정기徐居正記에는 「江之西有馬岩盤  峻  奇特絶  水之功 大爲黃驪一州所賴 岩之名由是而著稱」이라 하였다. 명소회엽서名所繪葉書의 사진을 거꾸로 보면 전년에 붕괴된 항주杭州의 뇌봉탑雷峰塔과 비슷함도 기취奇趣의 하나이다.

 
  



*이 글은 고유섭,『고유섭전집 2』에서 발췌했습니다.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