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술문화의 몇낱 성격2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2-20    조회 : 5838

* 1에서 계속

  첫째는 상상력. 구성력의 풍부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다른 지상紙上에서도 (본서本書 2. <조선문화의 창조성>, 동아일보) 조선문화의 창조의 일면으로 예거한 것인데 이 상상력. 구상력이란 일반론으로 말한다면 어느 민족의 예술문화이건간에 그것이 예술인 이상 반드시 근본적 활동기능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필자가 이것을 특히 조선문화에 있어서의 특색으로 드는 것은 일본. 지나支那 등 조형미술과 비교하여 그 구규矩規가 산수적算數的으로 완전 제할除割되지 않는 일면을 말한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려면 일본, 중국의 건축建築 명부名部의 세부비례細部比例가 완수完數로써 제할 되지만 조선의 그것은 제할이 잘 되지 아니하는 일면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방구형평면方矩形平面의 건물이라도 일본, 중국의 건물은 그 절반만 실측實測하면 나머지 절반은 실측하지 아니하고서도 해답이 나오지만 조선의 건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질이 입체적으로 응용되어 있을 때 예컨대「창살」의 구성같이 매우 환상적인 구성을 얻는 것이다. 일본 건축의「床の間」의「차붕茶棚」등에서 볼 수 있는「위축違築」과 같은 구성이니 조선의 모든 공예적인 작품 내지 건축 및 세부장식에 허다히 응용되어 있는 일면이다. 불국사의 건축평면 내지 그 석제石梯와 다보탑多寶塔, 고려 만월대滿月臺 궁전평면宮殿平面 기타 각 사찰건물에서 볼 수 있는 창호窓戶 령자欞子의 등 알기 쉬운 예이다. 고유한 우리말로 소위 그「멋이란 것이 부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멋」이란 것은「멋 부린다」내지「멋쟁이」란 용어 예와 같이 어원적으로는 그것이 누가 말한 바와 같이 혹「맛」[첨甜]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의미로서는 인간의「택가락」의 형용사로 씌어짐이 본의였던 듯하다. 즉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다양성의 발휘이다. 그것에 대한 평가가 「멋」인데 그것이 형태적인 것에도 전용되어 다양성, 다채성으로의 기교적 발작發作을 뜻하게 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무중심성無中心性, 무통일성無統一性, 허랑성虛浪性, 부허성浮虛性이 많은 것이여서 일종의 농조弄調는 있을지언정 진실미가 적은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다양성의 특질을 의미하나 「팬실풀」이란 의미에서의 상상성, 구성성과는 같이 논할 수 없는 일면이다.

  이 상상성, 구성성이 진실미를 못 얻을 때 일종의 허랑虛浪한「멋」이란 것만이 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 승화를 못 얻을 때 한편으로는「군짓」이 잘 나오고 (기야箕野 이방연李芳運의 산수山水에 그 일례가 있다) 한편으론「거들먹 거들먹」하는 부화성이 나오게 된다.

  다음에「구수한 특질」을 들어다본다.「구수」하다는 것은 순박淳朴, 순후淳厚한 데서는 오는 큰맛[대미大味]이요 예리銳利, 규각圭角, 표렬漂冽 이러한 데서는 오지 않는 맛이다. 그것은 심도深度에 있어 입체적으로 온번蘊蕃있는 맛이며 속도에 있어 속질速疾과 반대되는 완만한 데서 오는 맛이다. 따라서 얄상굳고 천박하고 경망하고 교혜巧慧로운 점은 없다. 이러한 맛은 신라의 모든 미술품에서 현저히 느낄 수 있는 맛이나 그러나 조선미술 전반에서 느끼는 맛이다. 이것이 미술적 승화를 못 얻었을 때 그것은 텁텁하고 무디고 어리석고 지더리고 경계 흐리고...... 심하면 체면 없고 뱃심 검은 꼴이 된다.

  
  
 이와 대칭되는 개념으로「고수」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적은 것으로의 응결凝結된 감정이니 예컨대 이조백자의 색택色澤같은 데서 구체적 일반예를 볼 수 있다. 외면으로 일견一見 단순한 백白 일색一色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의 안으로 안으로의 응집동결凝集凍結된 특색이니 저「구수」한 맛이란 것이 안팎 없이 훈연한 풍미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 대하여 이것은 안으로 응집된 풍미이다.(호도胡桃 백자柏子, 건어乾魚, 호마유胡麻油). 구수한 것은 접함으로써 그 풍도風度에 서리게 되나(훈기焄氣이니) 이「고수」한 맛이란 씹고 씹어야[저작咀嚼]나오는 맛이다. 이것이 예술적 발양을 못 얻을 때 그것은 고비固鄙하고 빡빡하고 윤기 없고 변통성 없고 응체凝滯러운 것이 된다.

  「고수」함에 대응하여 「멋」이란 것의 유형으로 「맵자」하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맵시」에서 온 것인 만큼 「멋」과 함께 인간의 자태적인 데서 온 것이지만 이것은 얌전스럽고 탐탁하고 짜임 있고 조그마한 것에 대한 형용으로 고려자기의 일부로서 실례를 삼을 수 있다.「구수」가「큰맛」이었음에 대하여 멋이란 발산적發散的이며 공간적으로 유동하는 것이였고「고수」는「작은맛」[소미小味]인데「맵시」는 공간적 실위實圍가 역시 좁은 것이다.「맵시」가 예술적 발양을 못 얻었을 때 행동적 자태적으로 헐겁다 하지만 조형적으로 역시 결점으로 나타낸다.「맵자」하지 못한 것은 곧「헐거운」것이 되나니 이조예술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들 수 있다.「뒷손질」이 충분하지 못한 결함도 이곳에서 나온다.

  
  
「맵자」한 것은「단아」한 편으로 들어간다.「구수」한 것은 온아한 편으로 들어간다. 이 양자는 조선예술의 우수한 특색의 하나이다. 단아는 형태적으로 작은 데서 나와 풍도風度의 일미一味를 뜻하게 되고 온아는 형태적으로 큰 데서 나와 풍도의 다른 의미를 또한 보인다. 조대粗大, 조추粗麁, 난잡亂雜, 궤약跪弱 이러한 마이너스적인 결함의 일모一貌를 보인다.

  온아, 단아는 다시 색채적 일면에 있어 다채적 이어서는 아니 된다. 즉「멋쟁이」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질박質朴, 담소淡素, 무기교無技巧의 기교라야 한다. 손쉽게 이러한 점은 우리가 여인의 복식에서 보지만 일반이 우수한 조선의 공예에서 볼 수 있다. 색채적으로 조선이 다른 모든 나라에 비하여 매우 단색적이다. 그곳에 순박성이 보이지만 (조선에는 삼채三彩, 오채五彩, 칠채七彩, 경태개景泰蓋 등이 없다.) 이것이 일전하여 적조미寂照美의 일면으로 나온다. 감각적으로 단채적이나 또한 명랑한 것은 담소란 것인데 그것은 정서적으로 적료寂廖에 치우치기 쉬운 것이다. 적료의 예술화된 것을 필자는 일찍부터「적조미寂詔美」또는「적미寂美」라는 술어로서 형용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한 감각적이요 심리적이요 정서적인 것으로서 조선미술의 커다란 성격의 하나이다. 불교사상에 의하여 사상적으로 적료한 것은 불교문화권 내의 보편적인 성격이지만 조선에서의 적조미란 사상적으로 탐구하여 얻은 외부적인 아니요 생활적으로 육체와 혈액을 통하여 얻은 커다란 성격의 하나이다. 그것이 예술적 고양을 얻었을 때 예술 자체로서도 비로소 최고의 그 생명적 내오內奧의 깊이를 이루게 되나 그렇지 못하고 흘려버릴 때 애통한 곡조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벌써 예술적 가치를 떠난 세계의 아름답지 못한 성격이다.

  이상 조선미술에 있어서의 성격적인 개념을 초소草疏한 데로 나열시켜 보았지만 그 자세한 검토는 후일에 맡기고 그곳에 나열한 예만 보더라도 우수한 성격이면 우수한 성격, 열악한 성격이면 열악한 성격이 절대적인 극한개념으로서 사실의 위에 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모두 상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사실 그 자체에 있어서도 물론 저러한 성격들이 상대적으로 현현現顯되어 있는 것이니 시대를 같이하고서도 우열의 면이 각기 있는 것이요, 시대를 격隔하여서도 또한 각기 있는 바이다. 이곳의 조선미술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자면 역사적, 사회적 검토를 충분히 치러야 할 것이요. 본론과 같이 일반론적인 데서는 그 구체적 이해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 뜻에서 일반은 역사적 회고 반성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조선예술이 다른 나라 미술에 비하여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일반의 이해가 너무나 적은 것이라 하겠다.

  이 불행을 필자는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유식, 무식을 막론하고 작품 그 자체의 몰이해에서 수집, 보관, 장정, 보수 등에 실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추태를 많이 보이고 있음이다.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 도 우리 민중이 얼마나 예술교양에 있어 무식한가를 드러내어 남에게 보이는 점이라 하겠다.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파波치고 망亡치며 이조락관僞造落款은 왜 그리하여 진본을 그르치는 것이며 모모배관某某拜觀. 모모진감某某珍藏은 함부로 끄적거려 같지 않은 행세를 하려는 것인가. 그들로 하여금 실로 수많은 貴物이 악운의 낙인을 영구히 입게 되었다. 이 문화의 파괴자들이여---백도곤장百度棍杖이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라, 마땅히 재삼 번성할 일--- 다른 하나는 문기 즉 서권기의 결여---미술품에 대한 서권기의 문제는 미술 그 자체의 내용으로서의 중요한 일면인데 이는 특히 중국 서화에서의 용어로 작가 자신의 수양과 그로부터 작품에 침투되어 겉으로 우러나오는 일면의 성격을 두고 말한 것인데 이러한 작품 자신의 내용적 의미에서보다도 필자는 이곳에 작품에 대한 외면적으로부터서의 문학적 이해의 용의의 결여를 뜻하고자 한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미술품에 대한 문필인들의 이해 관심의 결여와 그 문학적 표현의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동서를 불문하고 미술에 대한 일반 민중의 관심의 향상은 문필인들의 그 문학적 재현으로 말미암아 수행됨이 큰 것이었다. 미술은 원체 말 없는 물건이다. 이 말없이 있는 것의 진실로 좋은 일면을 문필인이 발천發闡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미의식 향상에 도움도 되려니와 일반민중의 미의식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일반민중의 미의식의 향상은 곧 그 사회의 미술문화의 향상이며 그 사회의 미술문화의 향상은 이내 곧 다른 문화의 향상이 된다. 문화부분은 서로의 도움이 있지 않으면 서로의 높은 발달이 없는 것이니 조선의 미술이 조선의 문필인으로 말미암아 관심되지 아니한다면 조선의 문필문화 그 자체도 조선적 미에 있어서는 빈약한 것, 또는 이방적異邦的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근래 몇 사람 문학인들이 어쩌다 취재하는 것으로서는 조선미술의 문학성 서권기 즉 일반적으로 말하여 문화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지나支那의 모든 미술, 골동은 조선에 있어서까지 문화적 요소를 이루고 있으면서 본국의 미술이란 것이 오히려 문화적 성원을 이루지 못하고 토석土石같이 버려져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큰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때까지 조선의 미술이란 실로 문화의 테두리 밖에 버려져 있다. 그러고서야 어찌 다른 미적 문화가 있을 수 있으랴. 

 
*이 글은 고유섭,『우리의 미술과 공예』에서 발췌했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