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미술의 특징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8-01-05    조회 : 4710
삼국三國이란 고구려ㆍ백제ㆍ신라를 두고 말함이나「사기史記」가 전하는 이 삼국의 시원始元이란 부락추장제시대部落酋長制時代의 사실에 지나지 않고,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의 국가 정치의 시작은 훨씬 뒤떨어져 고구려는 AD 1세기 후반인 태조왕太祖王 때에 건국建國이 있었고, 백제는 3세기 후반인 고이왕古爾王 때에 있었고, 신라는 4세기 후반인 내물왕奈勿王 때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있다. (이 백제ㆍ신라의 건국 세대에 관하여는 이병도李丙燾씨의「삼한고三韓考」에 의함) 즉 고구려와 백제와의 시대상으로 본 건국연수建國年數의 차이는 근 2백 년이나 있고 백제와 신라와의 건국연수의 차이는 약 백년이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와를 비교하면 3백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건국에 있어서의 이만한 차이는 실로 곧 각기 문화의 차이가 아닐 수 없었고, 또 그 국가의 위치를 두고 말하더라도 고구려는 남으로 한군漢郡과 일찍이 접했고 서북으론 변방이나마 중국과 연접되었던 까닭에 일찍이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음이 컸고, 백제는 북으로 한군의 유문遺文에 접할 수 있었고 서로 해로海路가 통하여 중국의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었지만 신라는 반도의 동남東南에 편재偏在하여 중국 문물에 직접 접할 수 없었고 고구려ㆍ백제를 통하여 간접으로 그 문물을 얻었다. 신라가 중국 문화를 직접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진흥왕眞興王 이후 한산주漢山州의 지방이 그 영역에 들어 해로海路가 터진 이후였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견사遣使의 도수度數로 말한다면 고구려가 제일 많았고, 다시 도수로 말한다면 고구려보다 매우 못 하나 백제가 제2위에 있고, 신라가 맨 끝에 있다. (이곳에서는 삼국 통일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중국과의 접충接衝의 다소가 자국自國 고유 문화의 개발을 위하여 행복되는 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당시의 사정으로 본다면 천하의 문물이란 오직 중국에만 있었던 까닭에 그러한 고도의 문화를 많이 수입하느냐 못 하느냐는 것은 곧 한나라 문화의 흥체興替를 좌우하는 문제이니만큼, 삼국 통일의 행운이 비록 신라에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적 견지에 있어서는 신라는 확실히 불리한 지위에 있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 미술 문화를 비교하는 이 자리에 있어서도 신라는 확실히 뒤떨어진 지위에 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접충하고 있던 중국의 문물이란 것도 고구려는 그 위치상 자연히 북중국 문물에 많이 접하게 되었고 백제는 남중국 문물에 많이 접하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은 서로의 문화 차도 큰 것이 있다. 이 중간에 개재했던 신라는 그 위치로 말미암아 불행히 중국과의 직접 교섭이 비교적 적지만 어느 의미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또한 다행한 점도 있었으니 그것은 고구려ㆍ백제를 통하여 두 문화의 수이점殊異點을 간접적 잔재殘滓의 획득에 불과하나마 종내는 한몸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불교가 수입된 이후로는 삼국미술 문화가 돈연頓然히 발달되어 주제의 공통성이 많게 되었음은 이 삼국 문화의 내용을 일색으로 물들인 흔적이 농후하여 이 점에서 본다면 삼국간에 차이가 없다 하겠지만, 풍토ㆍ습속 등에 인연된 양식상 차이, 양식 감정ㅇㅢ 차이가 동일 문화권에 있던 삼국으로 하여금 호차互差를 내게 한 것은 또한 주목할 요점의 하나일까 한다. 즉 주제에서 볼 때 삼국 문화는 동일한 점이 많으나 양식에 있어 서로의 출입이 있는 것이니, 이 점을 통하여 필자는 이곳에 삼국 미술 양식의 수이殊異ㆍ특징을 말해 볼까 한다. 앞에서 말한 고구려에 북중국 문물의 영향, 백제에 남중국 문물의 영향이란 것도 결국은 이 호차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1) 고분양식古墳樣式의 차이와 미술美術

먼저 고분양식古墳樣式을 통하여 삼국의 호차를 비교한다면 일반으로 외형의 원분양식圓墳樣式은 삼국이 다 공통되어 있는 것이나 특히 고구려에 있어서의 피라미드형 사각추장식형四角錐狀式形은 신라ㆍ백제에 없는 것이며, 신라에 있어서의 특수 형태인 쌍원雙圓(표형瓢形) 형식의 외모 형태는 고구려ㆍ백제에 없는 것인데, 그 묘실墓室 형식에 있어서 고구려에는 거대한 부실複室이 3단의 층절層節과 투팔천정鬪八天井이라 하여 서역이서西域以西에 특유한 천정 형식이 복잡히 경영되어 있는데, 백제에 있어선 묘실이 일반으로 적을뿐더러 단형單形이요 (선도羨道를 가졌으나 고구려에서와 같은 전실이랄 것이 없다는 뜻), 천정은 반궁륭상半穹 狀이나 보통은 인자형 사면층절人字形斜面層節을 가졌다. 이에 비하면 신라의 고분은 적어도 통일 이전의 것에서 아직 묘실의 경영이 없었다 하여도 가하여 잡석雜石으로서 관棺의 외위外圍를 덮어 버린 것이 많아 이를 요컨대 신라 고분에 있어선 내부가 충색充塞되었고 외부에 있어서 다소의 양식적 기교를 보이려 하였고 백제에 있어선 외부의 기교란 별로 없는데 내부에 있어서 다소의 기교를 부렸고, 고구려에 있어선 내부 외부 마찬가지로 기교를 부린 편에 속한다.

  

이 때 이들의 경영방법을 비교하면 일률一律로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있어 고구려는 힘으로써 모든 것을 구성시키려 함이 보이니, 예컨대 석실石室을 경영하되 그들은 세부 양식의 규제 통일이라 함보다 전체 양식의 구성에 致意한 점을 볼 수 있나니, 강서고분江西古墳 국내성國內城 고분 중에 석재로 경영한 묘실 벽면은 체제가 동일한 석편石片을 규모 있게 모으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큰 돌을 사용하여 일거에 전형태를 구성하려 한 흔적이 많고, 백제는 이러한 만용적蠻勇的 기개는 전혀 의식적으로 피하고서 규모가 같은 여러 개 석편을 규모있게 쌓아 모아 전체를 구성하였다. 부여의 정림사지탑(속칭 평제탑平濟塔)은 후자의 좋은 예이며 강서고분 중 묘광실墓壙室의 석벽 내지 국내성 장군총將軍塚의 천정석天井石, 주위 입석立石 등은 전자의 그 좋은 예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신라는 비교적 기교를 우롱함이 없고 따라서 양식 구성에 특별히 치의致意함이 없고 힘대로 긁어 모으는 사이에 어느덧 양식이 하나 생긴 듯하니, 말하자면 고구려ㆍ백제에는 양식 기교가 처음부터 목표로 서 있었고, 신라는 양식 기교라는 것이 저절로 후에 생긴 듯한 감이 있다. 이는 마치 고구려ㆍ백제가 그 건국에 있어 얼마전 자각적自覺的 주견主見이란 것이 있었는 데 반하여 신라에는 자각적 주견이라기보다 주위의 영향에서 저절로 국가 형태를 ㅇㅣ루게 된 것과 상통함이 있는 듯하다. 전설에 불과하는 일이나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 등이 건국에 있어 분주하였던 것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저절로 나서 저절로 추대된 형식들과 상응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구려 양식에서는 넘치는 힘을 그치지 못하여 힘의 낭비라는 것을 보게 되고, 백제의 양식에서는 자라는 대로 제 힘을 발휘하되 될 수 있는 대로 지혜知慧와의 조절을 차리고 있고, 신라는 힘을 힘대로 발휘하되 유유불박悠悠不迫하여 탕탕蕩湯이 나가려는 점이 있다. 백제는 자칫하면 영리怜悧에 떨어지기 쉬운 조자룡趙子龍이요, 고구려는 자칫하면 성급性急에 떨어지기 쉬운 장비張飛요, 신라는 기교 없는 관우關羽인 양하다. 신라가 기교를 가지려 하기는 통일 전후부터요, 그 후라도 신라는 어디까지 탕탕한 점이 있다. 고구려는 패도覇道에서 살았을 것이며 백제는 교지巧智에서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회화 미술에서 비교할 수 없음은 섭섭한 노릇이다. 이것은 고신라기古新羅期의 회화 흔적이 발ㄱㅕㄴ될 때까지 보유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지만, 한두 공예품의 단편화斷片畵로써 비교하면 연전에 국내성에서 발견된 고분벽화 중 안테미욘 무늬가 있는 벽화는 고호적 힘에 넘치는 동요가 있는데, 경주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에서 발견된 칠기漆器의 파편 중에는 주朱ㆍ백白ㆍ황黃 3색의 화편畵片이 있으되 순박하고 유유한 중에 신장伸張의 기세가 보인다. 이 신장의 기세를 제외한다면 어둠 없는 고갱(고갱에게는 어둠이 있다)이다. 다시 백제의 회화미술繪畵美術을 능산리陵山里 고분 벽화에서 든다면 규각圭角을 죽인 세잔느(세잔느에게는 규각이 있다)가 될 것 같다. 전에 말한 부여夫餘 정림사지탑定林寺址塔도 규각 없는 세잔느다. 고구려에는 8각형 초석이 많고 실제 8각형 원주圓柱(용강龍岡 쌍영총雙楹塚)와 같은 예에는 그것이 8각에 그쳤을 뿐 아니라 다시 칸네리이렌(8각면이 안으로 굴곡진 것)이 있으니 역시 고호적 동요라 할 수 있다. 경주 분황사탑은 그대로가 고갱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 있어서 통일 이후의 것을 독자는 연상하지 말라) 물론 고구려에 있어서도 고갱적인 것은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고딕적 요소를 다시 가하여야 되고 운동성이 강한 것을 들자면 고호가 아니면 아니 된다. 신라를 비유함에 있어서 고갱이 너무 기하학적이요 이차원적이라면 앙리 루소를 다시 가미시켜도 좋다. 백제의 세잔느가 너무 강하다면 위트릴로를 가미함이 좋다.

  

 

*이 글은 고유섭,『우리의 미술과 공예』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