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악합주 수제천 - 한명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10-20    조회 : 4042
   음악을 언필칭 ‘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영원이라는 시간을 흘러가며 천변만화의 조화경을 펼쳐 내는 세월 역시 그 자체가 이미 예술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세월의 예술’, ‘천지의 예술’! 과연 이 같은 호칭에 걸맞은 음악이 우리의 생활 속에 존재할 수 있으며,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음악이 이에 해당될까.

  불문곡직하고 그것은 한국의 정악이며, 그 중에서도 수제천壽齊天이라는 천의무봉한 합주 음악이다.

  우리의 수제천은 세월을 닮았고 천지를 닮았으며 ‘나’를 닮았고 민족을 닮았고 역사를 닮았다. 그만큼 우리의 수제천은 소리를 매체로 하는 음악이되 음악의 차원을 뛰어넘는가 하면, 예술의 범주로 치부되되 예술의 의미망을 벗어나는 그 무엇임이 분명하다.

  수제천처럼 맹랑한 음악은 달리 있을 수 없다. 작은 편성일 경우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고 해서 고작 대금1, 피리2, 해금1, 북, 장고1의 여섯 악기가 펼쳐 내는 단출한 합주 속에 그토록 우리의 심성이 배어나고 민족사의 속성이 스며나는가 하면 내밀한 우주적 비경까지 응축되어 있으니 말이다.

  수제천의 특징은 그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유장한 가락에 있다. 어쩌면 그 구성 악기인 해금의 속성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해금의 줄은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다. 그리고 명주실은 뽕을 먹은 누에가 무한한 시간의 실타래를 뽑아 낸 것이다. 바로 그 누에가 시간을 자아 낸 철학의 실타래가 다름 아닌 수제천의 유장한 가락이다.

  옛말에 ‘대악은 천지와 더불어 화순한 것이고(大樂與天地同和) 대례는 천지의 조화처럼 질서가 분명한 것(大禮與天地同節)’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바로 수제천의 실상을 그대로 대변하고 또한 반증해 주는 명언이다. 온화한 질감의 결 고운 가락이 굽이굽이 물결지며 흘러가는 수제천은 따뜻한 하늘의 양기가 만물을 고르게 화육化育하는 천지의 대악大樂 바로 그것이다.

  또한 자유분방한 듯 거침없이 흘러가는 가락의 홍수 속에서도 역시 낙이불류樂而不流의 법도와 차서次序가 분명하니 이 또한 질서 정연한 천지의 대례大禮, 즉 우주의 오묘한 내재율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정읍 혹은 빗가락정읍 이라고도 불리는 수제천은 전통 음악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는 곳이다.

  전통 음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악을 손꼽으라면 대부분의 국악인들은 서슴없이 앞세우는 곡이 바로 수제천이며 우리 음악에 낯선 이방인까지도 ‘영적인 음악’이니 ‘천상의 음악’이니 하며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라고 동의하는 곡이다.

  사실 수제천 음악에는 그만큼 우리적인 속성, 우리적인 분위기가 다분히 포괄되어 있다.

  우선 연음連音 형식이라고 해서 각 악기의 가락과 가락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선율적 특성은, 바로 우리 문화의 속성인 선적인 측면의 적나라한 구현이오, 우리 민족의 기질인 ‘은근과 끈기’의 음악적 현현이다.

  부드러운 혀가 견고한 이빨보다 강하고, 유연한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뚫듯이, 섬약한 듯한 선적인 속성은 강철보다도 강인한 게 사실이다. 흔히 ‘은근과 끈기’로 대변되는 우리의 민족성은 그래서 그 어느 민족의 고유한 기질보다도 한층 강인하다. 바로 이 외유내강의 끈질긴 민족 기질이야말로 숱한 우여곡절 속에도 유구한 민족사를 온전히 지탱해 온 원동력이다.

  이 같은 민족 기질을 토양으로 해서 배양되고 직조된 음악이 다름 아닌 수제천의 유장한 선율이다. 그러니 연면히 흘러가는 수제천의 가락이야말로 결코 일상적인 음악 속의 범상한 가락이 아니다. 작게는 우리네 심성의 분신이요 크게는 고유한 민족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상징물인 것이다.

  식물성 악기의 온화한 음색이 우리의 후덕한 인성을 한층 절실하게 드러내 주는 수제천의 또 다른 특성이라면, 느짓한 한배가 펼쳐 내는 장중하고도 품위 있는 곡태는 동양적 정관靜觀의 세계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흔히 우리 문화의 인자를 정태적情態的이라고 진단하듯이, 느짓한 한배와 유장한 흐름의 수제천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어느덧 우리의 영혼은 육중한 사색의 심연 속으로 침잠되며,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한 명상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도도한 물줄기가 매끄러운 조약돌을 조탁해 내듯 누대를 통한 수다한 음악인의 명인기와 달관된 풍류가 완벽하게 다듬어 놓은 음악이 곧 수제천이다.

  그래서 수제천은 사람이 지은 음악이되 이미 인공의 차원을 뛰어넘으며, 예술적인 기교에서 출발하되 이미 ‘무기교無技巧의 기교’로 접어들며 순수 자연에 합일되고 만다.

  결국 수제천의 유장한 가락 속에는 내가 있고 민족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자연이 있다. 다시 말해서 수제천의 배면에는 예술인 개체의 감성이 흐르는가 하면 민족의 기질이 흐르고 유구한 역사의 속성이 흐르며 자연의 순리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수제천의 도도한 합주가 흐르는 한 겨레의 고유인자는 항존한 채 민족사의 관성은 꺾이지 않고 연면히 흐를 것이다.



* 이 글은 나라음악큰잔치『우리소리 우리마음』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