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모리 장단과 일탈의 미화 - 한명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9-21    조회 : 4325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구부정하게 휘어 자란 소나무가 멋있어 보인다. 똑바로 흘러가는 강줄기보다는 한번 휘청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에서 멋을 느낀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 들녘에서도 봉곳 솟은 언덕이 있어야 제격인 듯 싶고 비스듬히 내려뻗은 기와지붕에서도 살짝 위로 향한 중지곡선이 있어서 근사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멋을 유발하는 근원은 상도常道나 정형定型에서 약간 벗어나는 경지임을 알 수 있겠다. 상도나 상궤에서의 일탈, 일상성이나 정체성停滯性에서의 일탈, 속박성이나 규격성에서의 일탈, 진부한 관행이나 기계적인 인공에서의 일탈, 그것은 곧 한국의 멋을 창출해내는 알파요 오메가임에 틀림없다.

  한국무용의 춤사위에서는 고요한 한 동작의 끝부분에 가서 살짝 강세를 주곤 한다. 허공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던 수건을 마지막 순간에 살짝 채는 살풀이춤의 율동이 그렇고, 속으로 물결 지는 내면의 흥을 간간이 어깨를 들썩 표출해 내곤 하는 한량무閑良舞의 춤사위가 그렇다. 고요한 정靜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다가 사뿐하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동적動的인 변화로 흥을 돋우고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마치 서예의 용필用筆에서 끝을 살짝 삐치는 적획翟劃의 묘미처럼 전형적인 일탈의 예이자 멋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모체가 되는 기본적인 악흥으로 일관하던 악곡이 어느 대목에 가서는 전혀 이색적인 분위기로 살짝 탈바꿈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악곡의 진미와 유현幽玄한 멋을 한층 실감하게 된다. 서술적인 가락들로 일관하다가 좀더 개성적인 수심가 가락으로 끝을 여미는 서도잡가西道雜歌의 돌출성이 그 예며 구수한 사설로 흘러가다가 창부타령 선율로 한층 흥을 돋우는 경기잡가京畿雜歌의 종지형이 그 예다.

  판소리 연창에서 간간히 튀어나오는 재치 있는 재담이나 질펀한 육두문자들이 그러하고, 유창하게 노래해가던 선율을 단칼에 동강내듯 아무 예비 없이 종지하는 평시조의 창법이 그러하다. 조용히 흘러가는 거문고의 음향 속에서 간간이 투박하게 대모(玳瑁:공명통을 보호하기 위해 씌운 가죽)를 내려치는 술대(거문고를 뜯는 막대기)의 타현음打絃音도 일종의 음악적 일탈이랄 수 있고, 부드럽게 유순한 대금가락에 짐짓 갈대청의 파열음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수법 또한 일탈의 멋부리기에 다름 아니다.

 모르긴 해도 일탈이 빚어낸 한국의 멋으로는 전통음악의 엇모리 장단만한 게 없을 것이다. 엇모리의 ‘엇’이란 삐뚤거나 어긋난 상태를 가리킨다.

  엇시조가 그 좋은 예이다. 45자의 정형시가 아니라 그보다 사설이 좀 길게 첨가된 시조가 엇시조다. 정형시조에서 어긋난 시조인 셈이다. 일종의 일탈이다. 따라서 엇모리 장단이란 곧 일상적인 장단과는 달리 일종의 변용을 추구한 이색적인 장단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리듬이 ‘강-약, 강-약’으로 일관했다면 그것은 규칙적인 장단이지만 만약 위와 같은 정규적인 리듬으로 나가다가 ‘강-강-약강-’하고 변화를 주었다면 이는 일종의 엇모리 장단인 셈이다.

  전통 음악의 엇모리 장단은 이 같은 원리를 정형화한 특정한 리듬인데, 그 속에서 배어나는 예술적 속멋이란 여간 기막힌 게 아니다. 가위 엇모리 장단에 내재된 속멋을 모르고는 한국의 멋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엇모리 장단은 우리네 멋의 본질과 멋의 속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엇모리 장단에서는 자유자재의 원숙미가 넘친다. 분명 그것은 통상적인 규칙성에서의 일탈임에도 괴리감을 느끼거나 격이 깨지지 않는다.

  득도의 경지에 이른 예인의 일필휘지가 신품神品이 되듯, 그것은 탈선하듯 어깃장스럽게 짚어가는 고법鼓法인데도 오히려 난숙한 흥과 멋이 넘친다. 해탈한 고승의 무애無碍의 세계랄 수도, 혹은 마음 가는대로 따라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계에 비견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것은 한국미술을 두고 말한 ‘무기교의 기교-고유섭’나 ‘기교적인 무관심-제켈’과도 맥이 닿는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멋을 유발하는 일탈의 개념이란 일단 원숙과 노련을 전제한다고 하겠다. 설익은 멋을 위한 억지의 이탈離脫이나 거역을 위한 의도적인 탈선이 아닌, 속에서 배어나는 난숙한 일탈, 그것이 곧 한국의 멋을 양조釀造시키는 효모酵母로서의 일탈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때가 되어 뜸이 들면 석류가 익어터지고 밤송이가 무르익어 알밤이 떨어지듯이 난숙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불거져 나오는 일탈, 바로 그 자연성과 완숙성이 멋의 원천인 일탈의 본질인 것이다.

  한편 엇모리 장단의 멋에는 풍류성風流性이 농후하다. 전통음악과 풍류성의 근친관계를 감안한다 해도 확실히 엇모리 장단에는 남달리 풍류적 감흥이 넘쳐 난다. 그러나 음악과 연관해서 음미해 본다면 그것은 일종의 정서적인 일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진부한 일상성에서 탈피해 무소기탄無所忌憚의 해방감을 누리는 경계세속의 영욕을 떠나 거문고의 악흥으로 기인처럼 살다간 물계자(勿稽子: 신라 내해왕 시기의 고관)의 행적과 같이 예의 경지를 넘나드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 명산대천을 찾아 가악으로 인생을 다듬어가던 화랑花郞들의 경우처럼 인위의 구각舊殼을 벗고 합자연적인 섭리를 좇아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처세하는 달관의 경지, 끼니가 없어도 음악으로 자적했던 백결百結의 일화처럼 바다만큼이나 넓은 도량의 낙천적인 세계관, 바로 이런 경지로의 감성적 혹은 정신적 일탈에서 오는 흥취와 자족自足이 풍류의 본모습이라고 하겠다.

  또한 숱한 풍상을 거치면서 충분히 결이 삭아 무르익는 난숙함이 아니라면 판소리의 기본 틀에서 명창마다 개성 있는 자신의 더늠(판소리 명창이 한 대목을 독특한 스타일로 다듬은 소리)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터이고 산조의 기본바탕에서 명인마다 자기류의 멋을 내며 독특한 유파를 창출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곧 일탈은 풍류성과 노련미의 결정체結晶體이자, 그것은 또한 새로운 창조의 동인動因이라고도 하겠다. 나무등걸에서 새순이 일탈하여 새로운 거목이 되고, 작은 씨앗에서 새싹이 일탈하여 새 생명을 만들고, 동일한 산조지만 개인적인 시김새(뉘앙스의 차이)나 더늠으로 일탈하여 새로운 자기류의 음악을 형성해내는 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탈은 곧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체로의 창조과정임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일탈이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소멸이나 파괴가 아님은 진眞과 선善과 미美를 바탕하여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연계되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치졸稚拙이나 겉멋이나 부조화로 전락되지 않음은 곰삭은 원숙미와 풍류적 기품氣稟이 전제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일탈이 빚어내는 한국의 멋은 생명 순환적인 창조의 원의지原意志에 다름 아니고, 우리의 존재를 긍정해 주는 삶의 진체眞體이자 원형질이며 한국적 자연관이나 인생관에서 발표된 희한한 향취의 미적 감흥이요, 문화적 정서라고 하겠다. 결국 음악을 통해 본 우리의 멋은 난숙한 일탈, 풍류적 일탈에서 오는 일련의 일탈의 미학美學인 셈이다.

 


* 이 글은 나라음악큰잔치『우리소리 우리마음』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