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음색이 부드러운가? 식물성 재질의 음악 - 한명희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9-05    조회 : 3760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을 오류 선생五柳先生이라고도 불렀다.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즐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버들을 심어 완상한 것은 도연명에 국한하는 예가 아니다. 서산에 지는 해를 양류사楊柳絲로 잡아 매고, 무정세월 한 허리는 노들 백사장의 휘늘어진 버들가지로 칭칭 동여매 보겠다는 어느 곡조의 노래말처럼, 선조들의 글귀에도 자주 오르내릴 뿐만 아니라 우리 강토의 어디를 가도 우리는 축축 늘어진 버들을 볼 수가 있다.

  버들은 이렇게 심심파적의 글귀 속에 자주 등장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토양에 걸맞은 수목이다. 가장 잎을 먼저 피우고 가장 낙엽을 나중에 떨구는 나무가 우리 나라에서는 곧 다름아닌 버드나무이다.

  따라서 우리의 봄은 버들에 실려서 온다고도 할 수 있다. 나비 등을 타고 오는 게 아니라 갯가의 버들가지가 휘젓는 미풍을 타고 우리의 봄은 온다.

  이렇게 우리에게 봄을 심어주는 버들은 또한 우리에게 저를 빼닮은 우리의 음악까지 심어준다. 냇가의 둑에 앉아서 불어보는 버들피리가 곧 그것이다. 보리피리와 함께 호드기라고도 일컫는 이 버들피리는 아마 모르긴 해도 몇 백년을 대대로 단군자손들의 무딘 가슴 속에 촉촉이 봄물을 대줘 온 주인공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핏줄 속에 대 자연의 서정을 접목시켜 온 우리의 고유한 악기 중에는 버들피리처럼 식물성 악기가 태반임을 알 수 있다. 합주 음악의 주선율을 끌고 가는 향피리며 세피리가 그렇고, 구름에 달 가린 듯 은은하고 부드러운 젓대나 퉁소에, 수정처럼 투명한 음향의 단소 또한 그러하다.

  식물성을 따지자면 어디 관악기에 한하겠는가  봉황이 놀던 오동 줄기를 베어 만든 거문고나 가야고는 어떻고, 앙증스런 해금이며, 오열하듯 구성진 일곱 줄의 아쟁이란 놈은 또 어떠한가 

  이렇듯 우리들이 즐겨 활용하는 보편적인 우리의 악기를 살펴보면 거의가 식물성 재질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두드리는 꽹과리나 징은 식물성이 아니고, 또한 서양 음악의 악기 중에도 주로 현악기의 공명통처럼 식물성 악기가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꿰뚫어보면 서양의 그것은 금속성 선호의 악기이고 우리의 그것은 식물성 선호의 악기임을 알 수가 있다.

  동서양이 다같이 식물성 공명통을 가진 현악기이지만 서양악기의 줄은 예외 없이 철사를 쓰고 우리의 악기는 예외 없이 비금속성인 명주실을 쓴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플루트는 목관이던 것이 지금은 완전히 쇠붙이관이며 목관 악기족들은 거의 금속성 재질을 달고 있다. 우리도 국악기 개량이라고 해서 한때 가야고 줄을 철사로 하고 단소의 관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보았지만 널리 보급되기는커녕 관심조차 조지 않던 게 저간의 우리네 감성적 취향이었다.

  지금까지 동서의 기본적 악기를 통해서 각각의 국민 정서의 색깔을 점검해 보았듯이 사소한 듯한 이 같은 양자의 정서적 취향은 결국 동서 음악이 각기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양 음악과 우리 음악이 다른 점은 여러 각도에서 구명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원인자 중의 하나가 이 같은 악기의 재질材質이 상위相違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목질이 쇠붙이보다 유연하듯, 식물성 재질이 농후한 악기로 편성된 음악은 금속성 재질의 악기로 연주해 내는 음악보다 그만큼 유순하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전통 음악의 합주곡이 일단 그 음향적 질감부터가 서양의 그것에 비해 한결 온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전통 악기의 식물성 재질 때문이다. 특히 여러 악기가 서로 불협화 음정으로 가락을 연주해도 가도 과히 귀에 거슬리지 않고 시종 화평한 여운이 남는데 이는 식물성 재질의 악기는 그 식물성적 음질 자체가 불협화적 상충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서양의 금속성 악기는 그 음질 자체가 냉철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음향적 개성이 뚜렷이 부각되는 편이다. 따라서 상호간의 음정이 불협화일 때는 한층 괴리감이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라도 애초 서양 음악은 각기 선율의 음정부터 따져 들어가는 수직적인 화성 음악을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물성과 금속성의 감각적 차이는 재질의 강유剛柔에서만이 아니라 촉간의 한난寒暖에서도 판연히 드러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식물성 재질에서 따뜻한 감촉을 느낀다면 금속성 재질에서는 한랭한 감촉을 전해 받는다.

  또한 이 경우의 따뜻한 감촉은 마치 우리들의 가슴 작용처럼 포근한 정감으로 이러지고, 한랭한 감촉은 마치 우리들의 머리 작용처럼 냉철한 논리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뜻한 질감의 식물성 악기는 가슴에 호소하는 감성적 예술을 잉태시키게 마련이며, 차가운 질감의 금속성 악기는 머리에 직소하는 논리적 예술을 배태시키게 마련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논리적인 서구 음악과 서구 문화는 결국 금속성 선호 감각의 결정체라고 하겠으며, 감성적인 전통 음악과 한국의 문화는 영락없이 식물성 선호 체질의 앙금체라고 하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식물성과 금속성 악기의 차이를 천착해 보면 이들 양자의 개성은 그 재질을 활용하는 공정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식물성 악기는 목질의 변형만으로 대부분의 공정이 끝나지만 금속성 악기는 광석에서 철분을 뽑아서 가공하듯 대상을 철저히 분해하고 합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결국 식물성 악기는 자연의 일부를 간단히 이입移入하면 되지만 금속성 악기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분석하고 변질 시키지 않으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들 양자의 차이란 곧 전자가 자연에 대한 순응과 감응의 자세에서 출발하는 데 비해서 후자는 자연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자세에서 출발하는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 음악에서 확인되는 음색적 분위기의 차이는 결국 식물성 재질의 악기냐 금속성 재질의 악기냐 에서 연유하고, 이는 다시 감성적 문화 구조냐 논리적 문화 토양이냐의 여부로 연결되며, 궁극에 가서는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 즉 귀의적 순응의 자세냐 아니면 도전적 극복의 자세냐로 귀착된다고 하겠다.





* 이 글은 나라음악큰잔치『우리소리 우리마음』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