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 호우壺 : 2 - 김용준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7-06-05    조회 : 4671
 (1에서 계속)
  이 동제銅製 호우 바닥에 명기銘記된 열여섯 자의 글씨는 최대한 글자가 한 치 평방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그 웅대한 기상은 보는 사람의 눈을 아찔하게 한다.
  일점일획一點一劃의 파별이 없다. 글자마다 우렛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사假使 파별 같은 인상을 주는 곳이 있다 치더라도 이것을 누가 분례에 가깝다 할 것인가. 고古하고 졸拙하며 기奇하고 위偉하다.
  그러면 이 두 금석문은 동일인의 필적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호우의 전문적 고증은 발굴 당사자의 조사 보고서와 제 대방가大方家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거니와, 우선 문외한의 호고심好古心은 먼저 사서史書의 페이지를 뒤치는 수밖에 없다.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을 천장하였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새겨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노라.” 이란 대문이 나오는데, 호우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 十’ 이라는 기년명記年銘이 있어 이 호우가 주조된 것은 호태왕 천장 익년翌年에 해당된다. 그리고 글씨의 자양결구字樣結構29)의 일점일획이 모조리 꼭 같은 것을 보아, 이 두 금석문의 필자는 동일인임에 틀림없고 호태왕 당시의 고구려의 이름 높은 서가書家임이 확실하다. 사승史乘30)이 전하지 아니하여 당대의 서화가의 이름을 찾아낼 도리가 없으나 모든 고증이 앞서기 전에 나는 대담하게 말하노니, 이것이 동일인의 서書라는 것은 나의 직관의 힘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고구려의 호우가 그때의 상대 세력의 나라인 신라에 와서 묻혔느냐.
  이 점은 발굴 당사자의 추측도 대략 그러하거니와 나 역시 그 추측을 동감으로 하여 사서史書를 더듬어 가는 수밖에 없다.
  신라 내물왕奈勿王 37년 임진(壬辰, 公元 392, 고구려 광개토왕 2년)에 고구려의 강대한 세력은 신라의 이찬伊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인질로 데려간다.
  그러나 실성은 그를 인질로 보내는 내물왕에게 원심怨心을 품게 된다.
  십 년 만에 돌아온 실성은 공교롭게 내물 왕자가 어린 것을 기회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의 보복 수단은 즉위하자 바로 왜국의 트집에 내물왕의 셋째아들로 십 세밖에 안 되는 미사흔未斯欣을 왜에게 인질로 보내고 그 후 십일 년 만에 또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다. 복호가 인질로 가던 해 광개토왕은 승하하고 그 후 삼년 만인 장수왕長壽王 2년 갑인甲寅에 호태왕의 능은 통구로 천장遷葬하고, 그 익년인 을묘년에 호우를 주출鑄出하고, 그 후 사년 만인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戊午 公元 418, 고구려 장수왕 6년)에 복호는 인질로 간 지 칠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고, 일본으로 갔던 미사흔도 동년同年에 도망해 귀국한다.
  신라의 이 두 왕자가 동년에 고국에 돌아오게 되는 데는『사기』와『유사』31)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나는 다시 신라의 의사義士 박제상朴堤上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예로 신라의 충의지인忠義之人으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두 왕자를 고구려와 일본에 보냈으나 첫째 왕자인 눌지마저 죽여 버리려 하여 여인麗人과 밀약하고 고구려로 보냈는데, 눌지의 신채神采가 비범함을 본 여인麗人은 도리어 눌지에게 그 비밀을 폭로해 준다.
  눌지는 귀국하자 자기를 해害하려던 실성왕을 시弑하고 자립하게 된다.
  왕은 즉위하자 두 왕제王弟를 그리워 비감해 마지않더니 마침 삽량( 良,『遺事』에는 羅로 적혔음)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遺事』에는 金으로 되어 있음)이 자원하여 왕자 복호를 구하러 떠난다.
  제상은 어전御前에서 왕과 잔을 나누고 악수로써 고별하고 북행하여 고구려왕을 만나 일촌설一寸舌32)로써 여왕麗王의 마음을 돌리게 하여 쾌락快諾을 받고 복호와 동귀同歸하게 된다.
  왕제 복호를 만난 눌지왕은 한편 기뻐하면서 한편 좌우 팔 같은 두 아우를 하나만 만났으니 어찌하자느냐고 탄식하여 마지 않는다.
  이에 제상은 개연慨然히 아뢰기를 신臣이 비록 노재奴才33)이오나 기위旣爲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바니 어찌 봉명奉命34)하지 않으리요.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요 임금도 현군賢君이라 일언지하에 쾌락을 얻었거니와 왜놈은 의로운 말로써 감동되지 못할 놈들이니 사모詐謀35)로써 왕자를 데려오리다 하고, 만일 성공하지 못하는 날에는 죽음으로써 맹세할 것을 약속하고 바다를 건너 멀리 왜국을 향한다.
  이 때 제상은 미처 처자妻子도 만날 여가 없이 떠나니 그의 부인은 율표栗浦의 포구浦口까지 쫓아오면서 대성통곡을 한다.
  그러나 제상은 왜왕 앞에 나아가 그가 신라를 배반하고 왜국의 신하 되기를 원하는 뜻을 말하고 왜왕이 의심하지 않는 때를 기다려 하루는 왕제 미사흔과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체하다가 미사흔에게 도망하라고 권한다.
  미사흔은 그대도 같이 가자 하였으나 제상은 같이 가면 반드시 잡힐 것이라 하여 미사흔은 울면서 제상과 작별하고 고국으로 도망해 온다.
  그 익일翌日 왜왕은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발견하자 제상을 포박하고 고문을 심히 하니 제상은 “신臣은 계림鷄林의 신이요 왜왕의 신이 아니라. 군왕의 명을 좇아 왕제를 도망시켰노라” 대답한다.
  왜왕은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다면 중록重祿36)을 줄 것이요, 계림의 신이라면 오형五刑37)에 처하리라” 하였으나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모진 매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중록을 원하지 않노라 한다.
  뜨겁게 달군 쇠로 찌르고 지지고 하였으나 종래 굴하지 않는지라 필경 목도木島에서 태워 죽이고 만다.
  후일 이러한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심히 애통哀慟하고 제상의 유가족에게 후사厚賜를 내리고 대아찬大阿 의 직위를 추증追贈38)하는 동시에 제상의 둘째딸로써 미사흔의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리고 미사흔이 환국하였을 때는 대연大宴을 베풀고 왕이 자작가무自作歌舞를 하였으니 향약으로  우식곡憂息曲 39)이란 것이 곧 눌지왕의 소작所作이다.
  두 왕자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거니와, 이것이『삼국사기』「열전」에 있는 것과  ;『삼국유사』「내물왕」조에 있는 것이 여러 군데가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인질로 간 연대도 다르고『사기』에 미사흔과 복호가,『유사』에는 미해美海와 보해寶海로 되어 있으며(이것은 한자로 取音한 관계이리라),『유사』에는 복호도 도망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 두 왕자 중에 복호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것이 신라 눌지왕 2년(公元 418)이고 보면 호태왕릉을 천장한 해로부터 오년, 호우를 만든 해로부터 사년만으로서, 호우명壺 銘에 ‘乙卯年…壺 十’이란 것을 보아 아마 호태왕의 위적偉績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우 열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복호가 얻어 두었다가 고국으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호우가 나왔다는 경주의 고분은 필시 복호의 무덤이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종래로 호태왕 비문에 ‘以甲寅年…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갑인년에…산릉을 천장하였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새겨 기록하여…’ 운운을 보고 입비立碑 연대를 갑인년(公元414)으로 잡던 것은 호우를 만든 을묘년(415)에 입비하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입비란 반드시 장례와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요 추후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니, 서체로 보아 동일인의 필적이요 기념 호우를 을묘년에 만들었다면 입비와 동시에 이 동호우銅壺 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 이 글은 김용준,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전집 1, 새 근원수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9) 글자의 모양과 짜임새.
30) 사기史記.
31) 근원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각각 ‘사기’와 ‘유사’로 약칭했다.
32) 한마디 말.
33) 열등한 재주, 또는 그 사람.
34) 임금 또는 윗사람의 명령을 받드는 것.
35) 남을 속이려는 꾀.
36) 후한 녹봉.
37) 옛날 범죄자를 처벌하던 다섯 가지 형벌. 곧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38)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벼슬을 높여 주는 것.
39)  우식곡 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보통  우식악憂息樂 이라고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