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인왕제색도> 3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12-20    조회 : 5574
 * 2에서 계속됨


  해질녘 고려 도읍에 말을 세우니
  흐르는 물 소리 중에 오백년이 잠겼구나
  黃昏立馬高麗國 流水聲中五百年

기이하고 웅장했다는 이병연의 시구 하나를 예로 들어본 것이다. 정선이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완성한 분이라면, 이병연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죽음이 기록되었던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거장이었다. 두사람은 스승 김창흡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자라나 동문수학한 이래, 서로를 격려하며 각각 시와 그림 분야에서 한 시대의 문화를 선도하였다. 정선이 무수한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화가였던 것처럼 이병연은 정선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늘 벗으로 자처했으며 각각 81세와 84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여느 사람의 한평생이 넘는 육십여 년 긴 세월 동안 시와 그림을 통하여 사귀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11년 전인 1740년 초가을에 정선이 양천陽川(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근처) 현령으로 부임해갈 때 이병연이 쓴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爾我合爲王輞川 畵飛詩墜兩翩翩 歸驢已遠猶堪望  愴江西落照天

 시 중의 망천은 당나라의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로 유명한 왕유王維(701~761)의 별장이니 왕망천은 곧 왕유를 가리킨다. 일찍이 소동파가 그 사람의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극찬해 마지않은 시불詩佛 왕유 바로 그 사람이다. 정선과 이병연이 자리를 함께 해야만 왕유의 시화詩畵를 겸할 수 있는데, 정선이 떠나가므로 두 사람 다 한 쪽 날개가 떨어진 듯 너무나 아쉽고 서운하다는 뜻이다. 사실 양천은 한양에서 가장 가깝고 경치 좋고 물산 좋은 고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하하기는커녕 이렇게 지척간의 이별조차 마냥 안타까워함은 두 사람이 얼마만큼 서로에게 소중했던가를 웅변해준다. 물론 정선과 이병연은 서로 잊지 않고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병연의 다음 시를 보자.
  
                  [그림 1 종해청조]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 온다’는 기약이 있어, 
      약속대로 가고 오기를 시작하였다.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둘 사이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
      모르겠네, 누가 쉽고 또 누가 어려운지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畵揮手 不知誰易更誰難 
 
 한양의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의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사천이 시로써 응하자는 아름다운 기약이 그 전부터 벌써 잇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낸 시화첩詩畵帖이 아직도 전하고 있으니 간송미술관 소장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그것이다. 이 화첩 서른세 폭에는 한강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보석 같은 걸작들이 줄지어 있지만 그 중에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그림 한 폭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아닌 위 이병연의 시를 주제로 한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라는 작품이다. 겸재는 작품의 제시로 위 시 가운데 앞의 두 줄을 적었는데 첫 글자 옆에 백문방인白文方印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천 금이나 되는 큰돈을 준다 해도 남의 손에 넘기지 말라!’ 는 뜻이니, 얼핏 보기엔 무덤덤하고 꾸밈새 없는 이 소탈한 그림에 얼마나 깊은 겸재의 우정이 스며있는지 알 만하다.
  
                                [그림 2 시화상간도]
 화면 중심에 아름드리 우람한 늙은 소나무가 둥치만 보이고 넓은 가지는 일산처럼 드리워져 아래만 약간 보이는데 그 아래 풀밭에 겸재와 사천 두 늙은 선비가 마주보고 앉아 시와 그림을 바꿔 보자고 약속을 한다. 등이 보이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단단해보이는 분이 겸재 정선이고, 정면을 향해 앉은, 큰 체수에 수염 좋은 분이 사천 이병연이다. 사천 이분은 앞서 보았듯이 과연 인왕산처럼 풍신이 훌륭한데, 두 분 모두 맨상투 차림으로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앉아 흉금을 터놓고 후일을 기약한다. 겸재 뒤쪽으로는 한 길쯤 되는 큰 바위가 박혀 있고 오른편 아래쪽으로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휘돌아간다. 늙은 소나무, 굳센 바위, 그리고 맑은 물, 이 모두는 예부터 좋은 벗의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서 작가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가장 친한 다섯 벗으로 꼽지 않았던가. 물은 구름이나 바람과 달리 ‘맑고 그칠 때 없는’ 벗이요, 돌은 꽃이나 풀과 달리 홀로 ‘변치 않는’ 벗이다. ㄱㅡ리고 소나무는 ‘눈서리를 모르는’ 기개가 있으니 ‘땅 속 깊이 뿌리가 곧은’ 벗인 것이다. 이 셋은 조선을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와 빼어난 시인이 만고에 모범이 될 우정을 나누는 이 그림에 참으로 걸맞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이 얼마나 허물없고 막역한 친구였던가는 신돈복辛敦復(1692~1779)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보이는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겸재 정선은 자가 원백元白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삼백 년래 으뜸가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을 구하는 이들이 삼대 들어서듯 빽빽하게 밀려와도 모두 응하여 게을리하지 않으니, 나 역시 같은 북쪽 동네에 살면서 공의 산수 그림 삼십여 장을 얻어서 항상 보배로 아끼고 있다.
 하루는 내가 사천 이공을 찾아뵈었다가 그 책장 위에 귀중한 중국 서책이 쌓여 벽을 메운 것을 보았다. 여쭙기를 “친척 어른(사천은 신돈복의 친척이었다)께서는 중국 서책을 어찌 이리 많이 갖고 계십니까 ” 하니, 이공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게 천오백 권이나 되는데 모두 내가 마련한 것일세!”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것이 정원백에게서 나온 것인 줄 누가 알겠는가  북경의 그림 시장에서 원백의 작품을 매우 중히 여기는지라 비록 손바닥만한 조각 그림이라도 반드시 비싼 값으로 사들인다네. 내가 원백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까닭에 그림도 가장 많이 얻었는데, 매번 북경 가는 사신 행차 때마다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보내서 볼만한 책들을 사오게 하였더니 이렇게 많이 모아졌다네” 하셨다. 나는 비로소 중국 사람들이 진실로 그림을 알아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이름만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로부터 시인은 가난할지언정 책 욕심이 많은 법이요, 화가는 또한 고운 새가 제 깃털을 사랑하듯 자기 그림을 아끼는 법이다. 그런데도 정선은 유독 이병연 이 친구에게만은 많은 작품을 흔쾌히 그려주었고 더구나 그것을 중국 시장에 내다 팔아 서책으로 바꾸어도 개의치 않았으니 두 사람의 우정은 서로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는 참으로 격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겸재가 곧 사천이고 사천이 곧 겸재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은 그림자가 사람을 따르는 것같이 한 몸처럼 지냈다고 생각된다.
 그런 까닭에 두 분께 모두 제자가 되는 창암蒼巖 박사해朴師海(1711~1778)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겸재와 사천의 합작 시화첩에 이러한 발문을 달았다.
 이 시화첩은 그림이나 말하자니 곧 시가 있고, 시라고 말하자니 곧 그림이 있는지라 시라 또는 그림이라고 이름 지어 한 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로시화二老詩畵’라 하였다. 그러나 이 제목 또한 시를 그림조다 앞세운 것이니 이것도 편중된 것이 아닐까  소리 울림은 적요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한 것은 겸재 노인의 그림시오, 쇠와 돌이 쨍그렁거리듯이 그대로 베껴내서 핍진한 것은 사천 선생의 시그림이다. 그림이 시가 아니라면 진짜 그림이 아니고, 시가 그림이 아니라면 좋은 시가 아니다. 또 그림만 그림인 줄 알고 시는 그림인 줄 모르면 그림을 잘 보는 것이 아니고, 시만 시인 줄 알고 그림이 시인줄 모르면 참으로 시를 아는 것이 아니가. 사천 선생께서 바라보면 겸재 노인의 그림이 바로 시이고, 겸재 노인께서 살펴보면 사첨 선생의 시가 바로 그림이다. 나는 두 노인 가운데 어느 분이 시인이고 어느 분이 화가인지 정말 알지를 못하겠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르게 하여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서 한 쪽으로 치우치ㅈㅣ 않게 하리라.
 겸재 노인이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육십 년간 예술로 사귀었던 친구 이병연을 잃을지 모른다는 정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으리라. 변화의 철학 『주역』의 대가이자, 팔순의 생애 동안 온갖 기쁨과 슬픔을 맛본 노인으로서 이제는 충분히 만사에 달관하여, 다가온 차디찬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차라리 그 자신의 죽음이었다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었던 마음의 벗으로 우정의 단단함이 쇠라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던同心斷金之友’ 오랜 친구 이병연, 내 자신이나 같으면서도 결국은 내가 아닐 수밖에 없는 늙은 벗의 임종이 다가온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정선은 북받쳐 오르는 마음속 초조함과 실낱 같은 친구의 회생을 바라는 절절한 원망願望을 참지 못하고 그만 크게 소리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화가였으므로 붓을 들어 화폭 가득 <인왕제색도>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소리쳤다. 가장 겸재다운 방법이었다.

* 끝
** 이 글을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