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인왕제색도> 2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11-20    조회 : 5420
 (1에서 계속)

  
                                                 [그림 1 정선, <인왕제색도>] 

  원래 <인왕제색도>에는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1730~1802)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제시題詩가 적혀 있었다. 겸재의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여 이 작품을 소장했던 만포는 순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매우 검소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까닭에 제대로 된 초상화 한 폭도 마련해두지 못했던지 후손들은 이 작품에 조상의 글씨가 있다 하여 사당에 모시고 제향을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에 <인왕제색도>는 덩달아 제사를 받은 셈이니 이는 역시 천하의 명품에나 있을 법한 흥미로운 일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까닭으로 이 작품이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나갔을 때 만포의 제시題詩가 떨어져 나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작품 상변上邊의 인왕산 꼭대기가 잘려 나간 것은 아마도 그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환지의 제시는 다음과 같다.

삼각산 봄 구름이 비를 넉넉히 보냈던가
만 그루 소나무 푸르고 윤기나게 그윽한 집을 둘렀구나.
주인 늙은이 틀림없이 깊은 휘장 아래 앉아
혼자서 『주역』의 하도와 낙서를 궁구하고 있겠네.

‘깊은 휘장’은 ‘드린 휘장’으로도 쓴다.
임술년(1802년) 4월 하순에 만포가 쓰다.
華岳春雲送雨餘 萬松蒼潤帶幽廬 主翁定在深 下 獨玩河圖及洛書
深一作垂 壬戌孟夏下瀚 晩圃書

제시를 보면 심환지는 그림 속 기와집의 주인이 필경 겸재 정선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겸재가 주역의 대가였다는 것은 당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최근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매우 흥미롭고도 결정적인 해석을 내렸다. 즉 <인왕제색도>의 제작 어름인 1751년 윤5월 29일에 - 작품 관지款識는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즉 ‘신미년 윤달 하순’임 - 정선의 절친한 벗이었던 대시인 사천 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죽었으며,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기와집은 바로 북악산 기슭 육상궁 뒷담쪽에 있던 그의 집이라는 것을 고증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임종을 코앞에 둔 육십 년 지기知己를 위하여 칠순 노인 정선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려낸 작품이 바로 <인왕제색도>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오랫동안 품어왔던 커다란 의문, 즉 이 작품에는 어쩐지 거실 감상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묵직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압도적인 힘과 비장한 감정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 그리고 점차로 개어가는 물안개에서는 무언가 슬픔의 정화淨化(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감지된다는 것, 또 저 기와집은 왜 유난히 씻은 듯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가 하는 등의 여러 의문점들이 일시에 풀리게 되었다. 앞서 만포 심환지의 후손들이 사당에 <인왕제색도>를 펴놓고 제향을 올렸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 후손들도 이 작품이 갖는 풍격을 부지불식간에 매우 잘 감지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좀더 살펴볼 점이 있었다. 그것은 정선이 윤5월 하순 중에서도 정확히 어느 날에 작품을 그렸을까 하는 것이었다. 29일 이후에 제작하였다면 그야말로 오랜 벗을 잃은 절망감 속에서 그렸다고 할 것이요, 그 전이었다면 평생의 친구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의 쾌차를 기원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렸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이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해보았다. 이 해 윤5월은 초하루부터 18일까지 이삼 일 간격을 두고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다가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이레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비가 줄창 내리더니 25일 오후가 되어서야 오랜 비가 완전히 개었다. 그렇다면 <인왕제색도>는 바로 그날 오후에 그려진 것이 틀림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왕제색도>의 상반부는 깎아지른 바위산이므로 평상시에 폭포가 있을 턱이 없다. 그 폭포가 작품 안에 세 줄기나 그려져 있는 것은 이레 동안이나 퍼부은 장마비가 갑자기 만들어낸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기와집 주변의 소나무 숲은 뚝뚝 물기가 듣는 붓을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러 삽시간에 그려냈다. 그것도 뒤쪽 소나무의 흐린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앞쪽 소나무를 짙은 먹으로 다시 그어댔기 때문에 부분부분 뭉개진 흔적까지 보인다. 궂은 날씨 속에서 사경을 해매는 벗을 생각하며 정선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 올라 개어가는 인왕산처럼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날 것을 빌면서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안개에는 희망처럼 보일 듯 말 듯한 푸른 먹빛이 배어 있다.

  정선은 또 인왕산의 우뚝한 기상과 이병연 집의 끼끗한 선묘線描로써 오랜 벗의 듬직하고도 고결한 인품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이규상李奎象(1727~1799)이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문원록文苑錄」에서 사천 이병연의 사람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데에서 알 수 있다. “키가 큰데다 수염이 훌륭했으며, 용모가 둥실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느 시인들의 가볍고 민첩한 모습과는 달랐다. 그 시는 천성天性을 얻어 근량斤量이 무거웠으며 시구는 기이하고도 웅장하였다……우리나라에 시의 거장이 여럿 있으나……삼연三淵 김참흡金昌翕 이후에는 사천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長身好鬚髥 容貌環偉 不似詩人之 捷者 詩得天性 斤量重而造語奇堀……我朝大匠……而三淵後 川一人.” 크고 둥그스름하고 위엄 있고 묵직허며 기이하고도 웅장한 것……그것은 바로 이병연의 모습이자 그의 작품 세계인 동시에 <인왕제색도>에 표현된 인왕산의 모습이다. 여기서 그 정상 부분이 원래 잘렸을 리가 없다는 가설 또한 확실하게 증명된다.

* 이 글은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