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인왕제색도> 1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11-10    조회 : 6388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가장 웅혼하고 장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한 점 들어보라면 나는 주저없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라고 대답하겠다. 국보 216호인 <인왕제색도>는 가장 남성적인 박력이 넘치는 화가이자 우리 산천을 우리 특유의 기법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 화필畵筆을 잡은 지 어언 육십 년, 그야말로 써서 닳아버린 몽당붓이 쌓여서 무덤을 이루었다고 하는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心意를 더하여 이루어낸 걸작이 바로 <인왕제색도>다. 공자의 표현을 빌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쫓아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 않게 된 從心所欲不踰矩” 경지라고나 할까!

  인왕산은 사실 높이가 338m밖에 되지 않는 산이다. 그러나 산 전체가 온통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상반부는 거인이 솟구쳐 오른 것처럼 거대한 암반巖盤이 송두리째 드러나 있다. 그래서 길게 누운 모습 전체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니 조선시대에 줄곧 명산으로 숭앙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전통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경복궁 뒤의 북악산이 서울의 주산主山이고 타락산 酪山을 낙산駱山, 인왕산仁王山을 인왕산仁旺山이라 쓰는 것은 일본인들이 왜곡시킨 표기 방식이다. 그 중에서 인왕산은 애초 왕조 초기에 새 왕궁터를 정할 적에 북악산 대신 서울의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란까지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국사國師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장했다는 이 제안은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왕조 천 년의 운세가 오백년으로 줄었으며 대대로 왕위가 맏아들에게 상속된 예가 적었고 또 불교가 크게 위축되었다는 설명이 아직도 야사野史로 남아 전한다.
  몇 년 전에 호암미술관이 제작한, 실물보다 약간 작지만 상당히 훌륭한 <인왕제색도>의 복제품을 얻은 적이 있었다. 표구가 썩 잘된 좋은 물건이었으므로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형님 댁 거실에 걸라고 드리고 나서 형님 댁에 갈 때마다 이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거실 장식용 그림이라 하기에는 부담스러우며 무언가 심각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흔히 보는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대용물로서 감상자의 마음을 밝고 편안하게 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보는 이의 정신을 압도하는 무거운 감정의 울림이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대체 작품의 어떤 점이 보는 이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림 1] 정선의 <인왕제색도>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큰 비가 온 끝에 그 비가 개어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화면 하반부로부터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면서 점차 위로 번져 나갔으니, 오른편 아래쪽에 기와집이 일부 드러났지만 다른 많은 집들은 모두 다 가려졌다. 반면에 화면 상반부는 아직 채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평소에 없던 세 줄기 작은 폭포까지 형성하며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정선은 비에 젖어 평상시보다 짙어보이는 화강암봉花崗巖峯을 큰 붓을 뉘여 북북 그어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듭 짙은 붓질을 더함으로써 거대하고 시커먼 바위산의 압도적인 중량감을 표현하였다. 아마도 <인왕제색도>를 바라볼 때 매번 나를 억누르고 약간은 비장한 느낌에 잠기게 한 것은 이처럼 위를 무겁게, 아래를 가볍게 처리한 상중하경上重下輕의 과분수 구도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 넘쳐나는 가공할 표현력의 외피外皮 안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다. 꼭 같은 인왕산을 그린 강희언姜熙彦(1738~1782)의 작품 <인왕산도仁王山圖>와 비교해보면 그것이 무엇인지가 더욱 분명하게 부각되어 성큼 다가선다. <인왕산도>는 화제에 보이듯이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멀리 바라보고暮春 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왼쪽 하늘 공간에 표암 강세황이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작품은 매번 지도와 비슷해서 너무 무미건조한 점이 걱정이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충분히 사실적이면서 도한 화가의 여러 법식을 잃지 않았다 寫眞景者 每患似乎地圖 而此건幅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豹菴”고 평해놓았다. 강희언의 작품은 과연 인왕산의 실제 산세를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내어 산등성이와 골짝, 한양성곽, 산자락에 기댄 자잘한 마음 등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이런 사실감은 하늘에 바림한 청색으로 더욱 뒷받침된다.
  그러나 우리는 강희언의 <인왕산도>에서 늦은 봄의 평화로운 인왕산 전경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떠한 암시도 받지 못한다. 반면에 정선의 <인왕제색도>에는 우선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이 있고, 그 다음 솟구치고 쏟아져 내리고 꿈틀꿈틀 유동하는 기세를 보이며, 끝으로 유난스레 맑게 눈에 뜨이는 오른편 아래 기와집의 씻은 듯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한 화폭의 형성에 관여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상반부 짙은 암봉의 시각적 충격과 하반부 물안개의 번짐이 조성한 여백이 상대적으로 허와 실의 교묘한 균형을 이룸으로써, 작품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끼던 긴장감이 점차 완화되고 나아가서 심리적으로도 다소 위안을 주는 듯한 효과가 은연중 엿보이는 것이다.
  비에 젖은 인왕산은 <인왕제색도> 화폭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주된 봉우리의 윗부분은 약간 잘려 나갔으며, 좌우나 아래쪽도 바깥이 생략되었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인왕산의 주봉이 망원 렌즈로 당겨진 듯 성큼 다가선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거대한 암벽은 매우 빠른 붓으로 늠름하게 쳐내렸고 골짜기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축축한 솔밭에는 푸른 빛이 배어 나오도록 먹빛깔의 농담을 묘하게 가려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도적인 중량감을 지닌 주봉의 봉우리가 약간 잘려서 화면의 상변과 맞닿아 있는 점이야 말로 참으로 극적인 구성이라 하겠다. 이렇게 소재의 일부를 생략한 구성은 회화적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이 작품의 예술성을 더욱 드높인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요컨대 <인왕제색도>가 갖는 강렬한 표현력은 그 굳세고 빠른 필력과 변화무쌍한 묵법에도 기인하지만 전체 구도에 힘입은 점이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조선시대의 사대부 출신 정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일까  정선은 『주역周易』을 깊이 공부해서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저서까지 남긴 인물이다. 또 적지 않은 선비가 그에게서 『주역』을 사사했다고 한다. 그가 음양陰陽의 원리에 깊이 들어가 있었음은 <금강전도>에서처럼 희고 날카로운 암산과 어둡고 부드러운 토산을 대비시킨 점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인왕제색도>의 경우에도 그 구도가 위는 무겁고 아래는 가벼운 모양 -『주역』에는 위아래 두 괘卦를 뒤바꿈으로써 심오한 사상의 깊이를 설명한 대목이 많다- 이 되도록 상식을 뒤집어 조정하면서 형상과 여백이 서로 교묘하게 침투할 수 있도록 세부를 다룬 점에서 가늠이 된다. 이 화폭 속에서 물안개로 인한 여백을 중심으로 암봉은 치켜다보고 기와집은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솜씨의 부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연 철학이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을 넘어서서 사람의 윤리와 국가의 운영 원리로까지 확장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때에 따른 적절한 변화의 효용을 중시하는 사상일지라도, 『주역』과 이에 바탕을 둔 성리학의 근본 정신은 항상 심상한 것, 중용적인 것, 무리하지 않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놓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문명이 종종 지나치게 추구하는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인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방만한 분출 등은 옛 성리학의 정신이나 그것에 바탕을 둔 옛 그림의 마음과는 일절 인연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화가 정선이 <인왕제색도>에서 한때 서울의 주산이 될 뻔했던 저 장엄한 인왕산의 주봉(主峰) 상단을 잘라냄으로써 작품의 조형 효과를 노렸다고 보는 것은 너무도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발상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원래 주산의 정상이 온전하게 갖추어졌고 하늘에도 다소간의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의 작품은 압도적인 박력과 함께 어디까지나 차분한 느낌을 잃지 않은 화격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 이 글은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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