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세한도> 1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09-07    조회 : 4769

 
  

                                                          [그림 1]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는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시절이 추우면 추울수록  사람들은 더욱 따스함을 그리워한다. 그리하여 조그만 온정에도 마음 깊이 감사하게 되니 이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것이다. <세한도>는 당대의 통유通儒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1844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로 제주도에서 5년째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56)이 자신을 대하는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이다. 추사는 그림 왼편에 화발畵跋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엄정하고도 칼칼한 해서체楷書體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 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라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 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이 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기원전 680년,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는 일이 흔했던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여공 公은 세가 불리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17년간 변방에 피신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보가甫瑕라는 대부大夫를 사로잡고는, 죽이지 않을 테니 자기가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협박하였다. 보가는 “놓아만 주면, 지금의 왕을 죽이고 여공을 맞아들이겠다”고 했다. 이에 함께 신 앞에서 맹세하고 풀어주니, 그는 과연 왕과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맞이했다. 그러나 돌아온 여공은 “너는 두 마음을 가진 자”라며 그를 죽였다. 보가는 죽어가면서 “무거운 은혜를 갚지 않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애당초 여공이란 인물 또한 간계奸計로 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자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듯 말로 다 못할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통탄한 나머지, 『사기史記』「정세가鄭世家」를 끝맺으면서 평하기를, 옛말에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는 한마디로 대신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말씀,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논어』「자한편自罕篇」에 보이는 글귀다. 이 말은 너무도 간명簡明하여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공자와 사마천의 얼핏 모순되는 듯한 위 두 인용문은 추사의 문장 속에서 예리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하나로 녹아들어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 격으로 보인 이의 비감悲感을 자아낸다. 

  발문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사기』의 「급암, 정당시 열전」에 보이는 태사공의 다음 사평史評을 인용하였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대저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 사람들도 세력이 있을 적에는 빈객이 열 배나 되었다가 세력이 없을 때는 흩어졌으니,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 하규현의 적공翟公에게는 이런 일까지 있었다. 적공이 처음 정위廷尉(지금의 검찰 총장) 벼슬에 올랐더니 빈객들이 문을 메웠다. 벼슬을 잃으니 문 밖에 새그물을 칠 만큼 찾는 이가 적었다. 그러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은 또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적공은 그 대문짝 위에 큰 글씨로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귀는 정情을 알았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자 됨에 사귀는 태態를 보았으며, 한 번 쉬하고 한 번 천해짐에 사귀는 정이 모두 드러났다”고 …… 돌이켜보건대 급암과 정당시의 생애 또한 그와 같았도다. 슬프다!(悲夫) 

  추사는 화발에서 사마천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똑같이 ‘슬프다(悲夫)’는 말로 글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발문 전체를 통하여 사마천의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문체를 그대로 본뜨고 있다. 사마천이 누구인가  그는 억울하게 죄를 입은 이릉李陵 장군을 위해서 정정당당히 변호하다가 한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불알을 썩히는 형벌)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장부丈夫로서 최대의 치욕인 궁형을 받고서도 끝내 자결하지 않고 뭇사람들의 조롱을 견디며 천추의 명작 『사기』를 완성해냈던 것이다. 김정희는 두 차례나 태사공의 말을 인용하고 그 문체까지 본받으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사마천과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추사의 뇌리에는 사마천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유배 생활을 결코 헛된 나날로 보내지는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 이 글은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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