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양식변천 2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07-22    조회 : 4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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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라에 있어서는 사정이 변하여진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전탑을 모模하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의 설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말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그 받침의 형식이 전조탑파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 발생사적인 계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석탑으로서 가장 최고最古한 것은 경주의 분황사탑(그림1)이다. 
  

이 탑을 석탑이라고 말한다면 매우 놀랄 만큼 불가사의로 여길 것으로 생각한다. 곧 그것은 이 탑의 양식이 전혀 전탑 양식에 속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탑을 구성하고 있는 그 재료는 순전한 전 이 아니고 돌이다. 회흑색灰黑色의 돌을 전 과 같이 소형 장방형으로 절단하여 쌓아올렸다.  이 탑은 신라 진평왕대부터 선덕왕조[선덕왕 3년, 634년 준공]에 걸쳐서 조성된 것으로 백제의 무왕 시대와 때를 같이 하고 있다. 신라 석탑의 출발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발달한 제2단의 변화를 보이는 탑이 있으니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로부터 북으로 떨어진 의성군義城郡 산운면山雲面 탑리塔里에 있는 5층 석탑(그림 2)이 그것이다.

이 탑은 돌로써 전탑양식을 모模한 것임을 곧 알 수 있을 만큼 되어 있다. 광대한 석단을 가지고 있다. 5중의 탑신은 이 기단 위에 실려있고, 옥개의 양변을 연결한 3각형의 양변은 기단 위에 깊이 들어가 낙하한다. 그리고 기단 위에는 초층탑신을 받기 위한 옥신괴임[屋身盤石]이 1매 끼워져 있다. 또 옥개 아래의 받침은 상하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첨출 出도 매우 축소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모두 저 분황사탑에 잘 통하는 점이다. 곧 기단이 광대하고 탑신이 그 위에 실려 있는 형식도 초층탑신을 받을 1매의 옥신괴임을 놓는 의사도, 첨하 下 받침의 수가 적은 것도 모두 상통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 의성탑에 있어서는 다시금 새로운 착상과 고수법古手法의 간략화가 행하여지고 있으니 예컨대 기단은 전혀 정비된 건축기단의 양상을 전하고 있으며 탑신의 옥신에는 주형柱形을 만들었고 사방에 있었던 감실龕室은 한 면에만 있게 하였다(그림 2 참조). 또 이 탑에서는 저 익산 미륵사지탑이나 부여 정림사지탑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단의 탱주 柱나 옥신의 주신柱身에는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점 만으로도 이 탑이 미륵탑이나 부
 여탑과 같이 양식발생의 초기에 속할 것이라고 단정되는 바인데, 또 하나 실증이 될 수 있는 것은 경주 고선사지 삼층탑과의 비교(그림 3)이다. 고선사는 신라의 고승인 저 유명한 원효화상의 주찰住刹로서 유명하다.
  
  
  
[그림 2 의성탑리 5층탑] 
  
  
  
[그림 4 법흥사지 7층전탑]  [그림 5 법흥사지 7층전탑 옥개도]

그러나 지금 이곳에 안동의 전탑 塔이라는 안동읍 신세동 법흥사지法興寺地 칠층전탑을 들겠는데 이 탑은 진정한 전탑으로서 조선 전탑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탑신 외형의 자태는 양탑이 서로 많이 유사하고 있다 하겠으나 이것을 양식 비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안동탑이 뒤늦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최대의 이유가 되는 점은 기단부의 차이인데 이 안동탑의 기단은 현재 원상을 남기고 있지 않으나 원래 2중기단이었던 것이 상정되고 있다. 그리고 하층 기단에는 각면에 몇 개의 탱주 柱가 있는데 그곳에는 엔타시스가 없고 또 벽판석壁板石으로부터 조출되어 있다. 탑신에는 주형柱形도 없고 받침의 수효도 많고 또 옥개에는 즙와葺瓦하고 있다(그림 5). 이곳에서 다른 비교는 곤란하나 무엇보다도 그 기단형식은 조선 석탑의 전형적인 것이 성립된 이후의 것에 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전형적인 것이냐고 하면 앞서 말한 고선사지탑이 그 하나인데 그 기단의 대부분이 매몰되어 있어 형태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형식이 전혀 동일한 경주 감은사지탑(그림 6)을 들겠다. 
  
[그림 6  감은사지탑]

감은사의 창건 연대는 신라 문무왕대부터 신문왕 2년(682) 사이인데 고선사와 거의 같은 시대에 속하며 탑의 실제 연대도 다소의 전후는 있을 것이로되 대략 같은 시대로 보인다. 이 감은사지탑은 탑신이 기단보다도 아직 약간 주체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단의 광대함도 뚜렷하여져서 옥개의 양변을 연결한 양사선兩斜線이 구성하는 저변의 길이는 거의 하층 기단의 폭과 적합한다. 그리고 초층탑신에 있어서 4우주는 전대의 양식을 그대고 가지고 벽판석과는 별석으로 조성되고 있으면서 기단의 탱주와 더불어 이미 엔타시스가 보이지 않는다. 또 기단의 갑석에는 전대의 기단에서 볼 수 없었던 연광緣 이 만들어지고 초층탑신을 받을 상단갑석의 상면에 있는 옥신괴임은 2단 형식의 조출로 되어 있다. 옥개의 낙수면은 고선사지탑과 같이 의성탑으로부터의 일전화一轉化가 행하여져서 목조건축의 옥개형식으로 개조되고 있는데 첨하 下 받침의 형식 및 첨출 出 깊이의 관계는 전혀 의성탑의 규범에 속하고 있는 점이 이해될 줄로 생각한다. 이곳에 이르러 고선사지탑이나 이 감은사지탑이 의성탑에서 일전一轉하여 생긴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기단의 형식도 또 하나의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바이다. 새로운 세대라고 말함은 제 7세기의 후반 곧 신라통일의 사실을 가리킨다. 백제에서 발생한 목조 탑파 양식의 재현 형식과 신라 자신에서 일어난 전조탑파 양식의 재현형식이 신라의 반도통일을 계기로 하여 이 양자의 종합적인 것으로서 고선사지탑이나 감은사지탑이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의 석탑은 이 양자를 전형적인 것, 규범적인 것으로 하여 그를 모模하였으며 점차 축소하고 간화簡化하고 편화便化함으로서 변화하여 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두 가지의 예를 들겠는데 그 하나는 경주 나원리탑羅原里塔(그림 7)이며 다른 하나는 경주의 전칭(傳稱) 황복사지탑皇福寺寺址塔다. 나원리탑의 기단형식은 고선사지탑이나 감은사지탑과 동일하다. 
그러나 초층탑신의 옥신 구성에 있어서 벽판석과 우주가 1석으로 합쳐졌고 4매의 벽판석은 엇물림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곳에 1단의 편화가 행하여지고 있다. 그런데 전칭 황복사지탑은 기단에 있어서 형식으로서는 전자와 동일하면서 하층기단의 탱주가 1주 감소되어 중 2주로 되어 있다. 아직까지의 예는 3주이었다. 탑신의 옥신도 1석으로서 만들었고 우주隅柱도 조출식造出式에 의하였다. 이 탑으로부터는 효소왕孝昭王 원년부터 성덕왕聖德王 5년 사이에(692~706) 창건된 명기銘記가 나왔는데 나원리탑은 약간 이 탑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양 탑에서는 기단이 고대高大하면서 탑신의 방대함이 여전히 보인다. 그런데 또 한 세대가 강하降下하면 기단의 크기와 탑신의 크기가 거의 같은 크기로 되어 간다. 불국사의 석가 3층탑과 같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리하여 점차 조선의 석탑은 건축적인 웅대한 것으로부터 공예적인 장식적인 것으로 되어 간다. 곧 탑신이 주제적이었던 것으로부터 기단 위에 실려진 장식적인 것으로 되어 간다. 김천군金泉君 갈항사지탑葛項寺地塔은 그 기단에 조탑명기造塔銘記가 있는 신라 유일의 예로서 전보 17년 곧 758년의 작품인데 전체에 매우 문아文雅하고 우아한 기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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