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양식변천 1 - 고유섭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07-05    조회 : 4559

  조선에 있어서 예술 작품의 일례로서 이것에 말하려 하는 탑파는 아주 통속적 상식적으로 탑이라 할 때 이것 일본에서 염두에 떠오르는 것은 저 층층이 솟아있는 목조의 탑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와 같이 중국 사람들의 염두에 가장 잘 떠오르는 것은 전탑 塔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선에 있어서는 탑이라 하면 거의 모두가 석조의 탑이어서 이곳에 세 지역에 있어서의 문화의 특수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에는 목조의 탑으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은 17세기 초두의 작품인 충북 보은군 법주사의 5층탑 1기가 있을 뿐이요 전탑은 현존하고 있는 것이 5기요 문헌이나 유적 등에 의하여 추정되는 것까지 모두 합하여도 10지指 내외에 불과하다. 그런데 석조의 탑은 실로 조선의 산야 도처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에 조선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나의 말도 자연 석조탑파가 주제가 되는데 이하 실물환등을 영사하면서 진행하기로 하겠다.

  
  

          그림 1 정림사지탑                                           그림 2 미륵사지탑
조선에 있어서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작품으로서도 우수한 것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탑(그림1) 속칭 「평제탑平濟塔」이다. 백제 말기의 국도였던 부여에 남아있는 탑으로서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할 때 당의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이 그 군훈軍勳의 비명을 이 탑 초층에 각기刻記하였는데 그 비명 초에 현경顯慶 5년(660) 건비建碑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탑의 건립은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따라서 백제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탑은 목조탑파의 외형양식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1단의 석단이 놓여 있으나 탑신보다는 매우 저소低小하여 기단이라는 것은 이 탑 전체에서 본다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것이다. 이 점은 후세의 제탑과 다른 바, 한 특색인데 후에 또 설명하려니와 후세의 제탑은 탑신보다도 기단부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곧 이 탑에 있어서는 탑신이 주체적인 의미를 충분히 갖고 있다. 이것이 우선 실제의 목조탑파의 경우 의사를 같이 하고 있는 까닭이ㄷㅏ. 다음에 옥개屋蓋의 양끝을 연결하여 본다면 그곳에 성립하는 3각형의 양변은 기단을 전혀 싸넣는 큰 저변을 구성하는데 이 점도 또한 후세의 탑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실제의 목조탑파와 의사가 통하는 점이다. 제 3으로 기단중석基壇中石의 탱주도 그러하지만 초층탑신의 4우주의 구조는 벽판석과 전혀 별개의 석주인데 그 우주에는 엔타시스의 의사를 충분히 갖게 하였다. 이것도 후세의 탑파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옥개도 목조건축의 자태를 요령있게 잘 전하고 있는데 층급형(받침)의 부분만은 특이한 모양을 보이고 있다. 실제 목조 건축에 있어서의 여러 단의 포의 교두翹頭를 하나의 포에 싸넣는, 말하자면 최대 공약수적인 포괄적인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례異例라고 하겠다. 이것은 예술적인 모디피케이션(modification, 변형)은 이 탑 전체에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아무리 이 탑이 목조 탑파의 실제를 잘 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전체로서는 실제의 목조 탑파와는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모형적인 것이ㄹㅏ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모형적인 것이면서도 실제 목조 탑파에서 볼 수 있는 당당한 기풍을 잘 전하고 있다. 옥개가 뻗어있는 곳에서 오는 긴장력緊張力, 수축율收縮率이 알맞게 되어 있는 점에서 오는 전체의 안정감, - 그러나 제 5층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수축되어 다소의 섬약감纖弱感이 있다. - 그리고 각 부분을 리드미컬한 인상, 이와 같은 여러 점은 참으로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품은 돌연히 출현하지는 않는다. 그곳에는 반드시 이 정림사지탑에 선행한 것이 있어야만 된다. 이 선행적인 작품을 나는 익산 미륵사지 다층석탑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이 탑은 백제의 국도이었던 부여로부터 조금 남방인 익산 미륵사지에 현존하는 탑(그림 2)이다.  현재 이 탑의 상층부는 없어졌으나 전체로는 삼간사지三間四至의 평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 탑에는 기단이 없다. 기둥에는 엔타시스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초층의 각 부분도 실제 처마의 받침이 층단식인 점은 목조 탑파에 있어서의 실제와는 다소 다르다. 목조 탑파의 실제와 서로 다른 점은 도리어 이 한 점뿐이라고 말하여도 좋을 만큼 다른 부분은 실제 목조 탑파의 자태 그대로라고 하겠다. 이곳에는 전체로서 모형적인 점, 혹은 예술적인 모디피케이션(modification, 변형)이 행하여진 점은 없다. 각 부분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도 아무런 정돈이나 규율화規律化를 받지 않고, 오직 전체로서의 목조 탑파의 실제 양상을 전하려는 곳에만 급급하고 있다. 재래에는 처마의 층급형 받침의 구조가 전탑에 있어서의 수법과 같다고 하여서 이 탑이 조선에 전조탑파가 유행하게 된 신라통일 이후의 작품이라고 말해 온 것인데, 나는 그와 같이는 생각하지 않는다. 


 
  
   
뒤에 조선의 전조탑파를 말하여 드리겠지만 이 탑과는 받침의 수도 다르고 옥개석과의 결구 곧 첨출 出의 깊이의 관계도 다르다. 나는 이 층급형 받침은 도리어 실제 목제 탑파에 있어서의 포의 교두翹頭를 단층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실지로 이 탑파 앞에 서서 보면 하의 1단은 별석조別石造이어서 약간 두꺼운 편이며 제 2, 제 3은 일석조一石造이어서 거의 같은 높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제 1단은 실제의 목조건축에 있어서 평판방平板枋이나 도리에 그 의사가 통하고 있다고 하겠고, 제 2, 제 3의 받침은 포의 교두의 수효를 표현하고 있는 것, 곧 이곳에서 그것은 중앙포작中昻包作 [二手先]의 교두를 단층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다. 제 5층 이상은 1단이 늘어서 4단 받침이 되어있다. 이것도 후세의 탑파에 있어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인데 후세에 있어서는 상하 각층의 받침 수가 같든지 혹은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감소되고 있다. 이것은 탑파가 더욱 축소화되고 모형화되어 가는 현상에 상응한 것인데 이 미륵사지탑에 있어서는 ㄷㅗ리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요컨대 탑이 크고 따라서 이것은 첨앙瞻仰할 때의 조화도를 고려한 것이라고 해석되는 바이다.
  
                           
  지금 실제의 목제 탑파를 들겠는데 보은 법주사 5층탑[捌相殿]이 그것이다. 이 탑은 현존하고 있는 조선 목조 탑파의 유일한 예인데, 초층에서는 2포작 단앙單昻[出組], 제 2층부터 제 4층까지는 5포작 중앙中昻[二手先], 제 5층에 이르러 옥신屋身[軸部]을 전혀 만들지 않고 그 대신에 포를 9포작三重翹頭[三手先]으로 하였다. 서로 시대를 달리하고 있으나, 실제로 현존하는 목조 탑파에 이와 같은 예가 있는 것이며 미륵사지탑의 경우도 결국 의도한 바는 그와 같은 점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보아서 나는 미륵사지탑을 저 부여 정림사지탑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전설상으로도 이 미륵사지탑의 창건이 백제의 무왕시대(600~640년)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의 양식론에서 말하여도 대체로 그것으로 가하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석탑은 이 2기밖에 없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은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재생시킴에서 출발하였다. 

 * 이 글은 한국미술사학의 정초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께서 별세하시기 만 1년 전인 1943년 6월 10일 일본 동경 문부성에서 열린 일본제학진흥위원회日本諸學振興委員會 예술학회藝術學會에서 환등幻燈을 사용하여 발표하신 전문입니다. 우리나라 탑파에 대한 선생의 오랜 연구를 요약한 최후의 총괄적인 논의로서 우리나라 탑의 변천에 대한 이해의 기틀을 다진 글입니다. 
 이 글은 『고유섭 전집』에서 옮겨 실었습니다.

그림 1 정림사지탑
그림 2 미륵사지탑
그림 3 미륵사지탑 부분
그림 4 법주사 팔상전


(2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