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의 거처 - 정약용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05-05    조회 : 4435
은자의 거처
題黃裳幽人帖
 
『주역周易』이괘履卦가 무망无妄으로 변하는 효사爻詞에 '유인幽人이라야 정貞하고 길吉하다'고 하였다. 이것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간산艮山의 아래와 진림震林의 사이에서, 손巽으로써 은둔하여 천명天命을 우러러 순응하며, 간산에는 과일 묘목을 심기도 하고 진림에는 채소를 심기도 한다. 큰 길을 밟으며 걸으니 탄탄하고, 하늘의 작록을 즐기며 기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은사의 넉넉함이니 은자의 삶이 그야말로 길하지 않은가 
돌아보면, 하늘은 맑은 복을 매우 아낀다. 왕후장상의 존귀함이나 도주陶朱, 의돈 頓같은 부자는 거름덩이나 흙덩이처럼 세상에 널려있지만, 구이괘九二卦의 길함을 누렸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옛 사람들 중에 ‘장차 전원으로 가리라’고 기록한 이는 있었으나, ‘장차 가겠다’는 것은 분명히 아직 가지 못한 것이다.
강진의 황상黃裳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를 묻기에 내가 다음처럼 말했다.
 
지역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강을 끼고 있는 산보다는 시냇물을 끼고 있는 산이 낫다. 골짜기 입구에는 높은 암벽이 있고 조금 들어가면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는 곳, 이런 곳이 복지福地다. 중앙의 판세가 맺힌 곳에 초가집 서너 간을 얽되, 나침반의 바늘이 정북과 정남을 향하도록 해서 정남향이어야 한다. 집 짓는 일은 극히 정교하게 해야 한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雪華紙로 벽을 바르고 문설주 위에는 담묵淡墨 산수화를 걸고 문설주에는 고목이나 대나무, 바위를 그리거나 혹은 짧은 시를 쓰기도 한다.
방안에는 책꽂이 두 개를 놓고 책 천삼사백 권을 꽂아 놓는다. 『주역집해周易集解』『모시소毛詩疏』『삼례원위三禮源委』와 고서, 명화, 산경山經, 지리지, 역법, 의약에 대한 설명서, 군사훈련의 제도, 군자금의 법식, 그리고 초목과 새와 물고기의 계보와 농정과 수리에 대한 학설에서 기보棋譜나 거문고 악보 등에 이르기까지 빠진 것 없이 갖춘다. 책상 위에는 『논어論語』한 권을 펼쳐놓고, 곁에는 질 좋은 화리목花利木으로 만든 탁자를 두는데, 위에는 도연명陶淵明 사령운謝靈運의 시, 두보杜甫 한유韓愈 소식蘇軾 육유陸游의 시, 그리고 『중주악부中州樂府』『열조시집列朝詩集』 등 시집 몇 질을 올려놓는다. 책상 아래에는 오동烏銅으로 만든 향로를 하나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옥유향玉 香 한 판씩을 피운다.
뜰 앞엔 높이 두어 자 되는 가림 벽을 하나 둘러두고, 담 안에는 갖가지 화분을 놓아둔다. 석류, 치자, 백목련 같은 것들을 각기 종류대로 갖추는데, 국화를 가장 많이 갖추어서 모름지기 마흔 여덟 가지는 되어야 겨우 구색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뜰 오른 편엔 조그마한 연못을 파는데, 사방이 수십 걸음을 넘지 않을 정도로 한다. 연못에는 연꽃 몇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른다. 따로 대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서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연못에 대고, 연못에서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을 통해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
채마밭은 수면처럼 고르게 잘 갈아야 한다. 그런 다음 밭두둑이 네모 반듯해지게 밭을 구획해서 아욱, 배추, 파, 마늘 등을 심되, 종류별로 나누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한다. 씨를 뿌릴 때는 반드시 고무래를 사용하여, 싹이 났을 때 보면 아롱진 비단물결 같은 무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채마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채마밭 둘레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도 심지만, 장미 수천 그루를 울타리로 심어 놓는다. 그러면 늦봄과 초여름이 교차되는 때 짙은 향기가 채마밭을 둘러보러 나온 사람의 코를 찌를 것이다.
뜰의 왼편에 사립문을 세우는데 흰 대나무를 엮어서 문짝을 만든다. 사립문 밖에서 산 언덕을 따라 오십 걸음 남짓 가서 바위 위를 흐르는 시냇가에 초가 한 간을 세워두는데, 난간은 대나무로 만든다. 집 주위는 온통 쭉쭉 뻗은 대나무들로 빽빽한 숲이니, 가지가 처마로 들어와도 꺾지 않고 그대로 둔다.
시내를 따라 백 걸음 남짓 걸을 즈음에 좋은 전답 수백 묘를 마련해 놓는다. 늦은 봄마다 지팡이를 끌고 밭두둑에 나가보면, 볏모가 파랗게 돋아나 푸름이 사람까지 물들이니, 한 점 속세의 기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소 논일을 하지는 말라. 다시 시내를 따라 조금 가면 큰 방죽의 한쪽 면과 만나는데, 방죽의 둘레가 오륙 리나 된다. 방죽 안쪽은 온통 연꽃과 기기연으로 덮여 있다. 거룻배 한 척을 만들어서 띄워 놓고, 달밤이면 시인 묵객들을 이끌고 배를 띄운다. 퉁소를 불고 거문고를 타며 방죽을 서너 바퀴 돈 다음 취해서 돌아온다.
방죽으로부터 몇 리를 가면 자그마한 절 한 채를 만난다. 안에는 이름난 승려 한 사람이 있어서 참선도 하고 설법도 하는데, 시를 좋아하고 술도 거리낌 없이 마시는 등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때때로 오가며 세상사를 잊으니, 이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집 뒤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용과 호랑이가 서로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소나무 아래에는 흰 학 한 쌍이 서 있다.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작은 남새밭 하나를 마련해 인삼, 도라지, 천궁, 당귀 따위를 심는다.
소나무 북쪽으로는 작은 사립문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누에를 치는 세 간 짜리 잠실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누에를 얹어 기르는 잠박을 칠 층으로 설치해 둔다. 낮차를 마시고 나서는 잠실로 간다. 아내에게 송엽주松葉酒를 따르게 하여 두어 잔 마신 뒤, 양잠법이 적힌 책을 가지고 누에를 목욕시키고 실을 잣는 방법 따위를 아내에게 가르쳐주며, 서로 바라보고 싱긋 웃는다. 문밖에 나라에서 부르는 글이 도착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지만 빙그레 웃을 뿐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구이九二의 길함’이다.
 
  

 
우리는 떠나는 꿈을 꾼다. 이 시드러운 세상살이 떠나서 다른 곳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다운 삶을 찾아 누리는 곳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곳엔 누구와 함께 갈까  무엇을 가지고 가고 무엇은 절대로 두고 가야 할까  그곳에선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이런 저런 공상은 공상이기도 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모습을 갖기도 한다. 우리는 그 모습에도 또 자신의 이론과 이상을 투영해 보기도 한다.
「초천연파조수지가」나 「양강우어자」에서 그리던 삶이 ‘나’를 잃고 허둥지둥 세상 길을 달려가던 시절, 쫓기는 새가 도망칠 곳을 찾듯이 그려보던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를 찾아 함께 사는 다산이 실제로 이룩했으며, 이상적으로 그린 경지가 「제황상유인첩」의 ‘은자의 거처’다.
1808년 봄, 유배지의 다산은 도암면 귤동에 있는 윤단尹 의 산정으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이곳이 소위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이 해에 다산은 다산초당 주변의 조경을 새로 하고, 제자들에게 『주역』을 가르치고, 문답한 것을 정리하여 『다산문답』1권을 엮었다. 이 두 가지 일이 한 가지로 얽혀 글을 이룬 것이 바로 이 「제황상유인첩」이다. 황상黃裳은 강진의 아전 집안 출신으로, 다산의 강진 시절 제자다. 


 *  정약용, 『뜬세상의 아름다움』,  박무영 옮김, 태학사, 2001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