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뜨락의 꽃나무들 - 정약용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6-04-20    조회 : 4269
내 뜨락의 꽃나무들 竹欄花木記
 
내 집은 명례방에 있다. 명례방에는 고관들의 저택이 많아, 번화한 네거리에는 날마다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서로 엇갈리며 달린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완상할 만한 연못이나 동산이 없다. 해서 내 집 뜰의 절반을 잘라 구획을 하고 좋은 꽃이나 과실나무를 구하여 화분에 심어 채워 놓았다.

석류 중에서도 잎이 두텁고 크며 열매가 단 것을 해석류라고도 하고 왜석류라고도 한다. 왜석류가 네 그루다. 줄기가 곧장 한 길 남짓 솟아오르고 곁가지가 없으며 위에는 쟁반 모양으로 둥글게 된 것(속칭 능장류다)이 한 쌍이다. 석류 중에 꽃만 피고 열매는 열리지 않는 것을 꽃석류라 하는데, 꽃석류가 한 그루다. 매화가 두 그루다. 세상이 숭상하기로는, 오래된 복숭아나 살구나무의 뿌리 중 썩어서 뼈처럼 된 것을 가져다 괴석 모양으로 조각해서 매화는 겨우 작은 가지 하나만을 그 곁에 붙여놓은 것을 기이하다고 친다. 그러나 나는 뿌리와 줄기가 견실하고 가지가 번창한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런 나무가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치자가 두 그루다. 두보杜甫는 “치자는 다른 나무에 비해, 인간 세상에는 진실로 많지 않다”고 하였으니, 역시 희귀한 것이다. 동백이 한 그루다. 금잔화와 은대화 네 포기를 한 화분에 심은 것이 한 개다. 돗자리 만한 파초가 한 그루요, 나이가 두 살 된 푸른 오동이 두 그루, 만향이 한 그루다. 각종의 국화가 열 여덟 개의 화분에 담겼고, 부용 화분이 한 개다.

그런 다음, 오가는 종들이 옷자락으로 꽃을 건드리지 않도록, 서까래처럼 생긴 대나무를 구해 그 동북쪽에다 울타리를 설치했다. 이것이 소위 ‘죽란竹欄’이다.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건을 빗겨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거닌다. 혹은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하니, 고요하여 산림이나 원포의 정취가 있었다. 그래 시끄러운 수레소리도 거의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윤이서, 이주신, 한혜보, 채이숙, 심화오, 윤무구, 이휘조 등 몇 사람이 날마다 찾아와 얼큰하게 마셨으니, 이것이 소위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부대끼며 살아야하는 도시 살림에서는 자칫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럴 때 간절히 그리운 것이 ‘푸른 친구’들이다. 이 말 없는 친구들에게 물을 주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얼굴들이, 얼굴마다 소박하고 청정한 생명의 기쁨으로 넘쳐난다. 이 친구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코에서 몸에서 사람의 지겨운 냄새가 빠져나간다. 그리고 나면 다시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베란다 정원이라도 만드는 것이리라.
다산은 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아이들이나, 친구들의 이름과 성격을 하나하나 적어보듯이.
죽란시사는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당시 촉망받던 남인학자관료들의 시 모임이다. 

 
*  정약용, 『뜬세상의 아름다움』,  박무영 옮김, 태학사, 2001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