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그림 그리고 인품(2)-강우방
글쓴이 : 학예실     첨부파일 :       날짜 : 05-03-25    조회 : 6774
인품을 중요시하는 전통
 
첫머리에 필자는 김홍도의 아마도 절필일 가능성이 많은 <추성부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글씨나 그림솜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품이며 그림에 인품이 우러나야 품격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 보인 표현주의적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정선이나 이인상, 김정희 등이 고결한 선비정신을 나타냈으나 김홍도처럼 정감어린 서정적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림을 보고 어떤 경우든 ‘아, 이 작가는 생의 마지막 경지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껴지는 작가는 고흐, 고갱, 호들러(Ferdinand Holder),마티스 등 서양에는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역정에 따른 마음의 변화가 그대로 그림에 반영된 작가를 한 사람 뽑으라면 단연 김홍도가 아닐까.
  

 
그림에 자기를 표현하다는 것은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예술의 원리지만, 우리나라같이 화가를 천시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김홍도는 그 선비다운 인품 때문에 비록 미천한 화원이었지만 임금의 은혜를 입었고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필적을 모은 유고집《단원유묵》화첩을 불교경전처럼 귀중하게 여기라는 홍현주(정조의 사위이며 뛰어난 문장가)의 말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서화가이며 시인인 조희룡은 그를 그리켜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신선과 같다”과 했다. 시인 홍신유도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이와 같은 고로 그림 역시 그와 같다”고 했다. 단원의 스승이며 시서화 삼절은 물론 평론가로서 당시 예원의 총수라 일컬어졌던 강세황이 단원을 평하기를 “얼굴이 준수하고 마음가짐은 깨끗하여 보는 이는 모두 그가 고상하여 속세를 넘어섰으며, 시중거리에 흔한 자잘한 무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그는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에도 그 묘(妙)를 다했으며 풍류가 호탕했다.…그의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으며 계단과 뜨락이 그윽하여 집 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든다”고 썼다. “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이 본래 두 갈래가 아님을 참으로 알지 못한다.…그러므로 글씨에 능하면서 그림을 하지 못하면 곧 그 폐단이 고루한 것이며, 그림에 능하면서 글씨를 하지 못하면 즉 그 폐단은 속되다고 한다. 이 두 가지를 겸한 이는 바로 단원뿐인가…. 이 서첩은 단원의 그림이라고 일러도 역시 가할 것이다.”라고 홍우건은 유묵첩에 썼다. 이렇게 입을 모은 찬탄의 말ㅇㅔ서 단원은 고매한 문인의 한 전형으로 떠오른다. 이처럼 많은 문인 사대부들은 단원의 인품과 글씨와 그림이 일치함을 보고 그를 사랑하고 찬탄했던 것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서양의 천재란 개념이 과연 동양에도 있는가 생각해 왔다. 서양의 천재란 동양의 군자와 다르고 고사(高士)하고도 다르다. 그런데 서양의 천재는 도덕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하다. 동양에는 신동이라는 것이 있으나 어린 나이에만 한정하고 있어서 서양 개념의 천재는 없는 듯 하다. 군자나 고사는 오랫동안 배워서 닦은 노인의 모습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인품을 중요시하여 왔다. 그런데 문인이 그렸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문인화라고 할 수 없다. 문인이라고 해서 모두 인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인이라는 이유로 서툰 솜씨를 관대하게 대해 주어도 안 될 것이다.

청대의 진형락은 “문인화의 요소 가운데 첫째는 인품이요, 둘째는 학문이며, 셋째는 재능이고, 넷째는 사상인데, 이 네 가지를 갖추면 가장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문과 사상은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필자는 인품, 학문, 재능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원은 비록 학문을 이루지 못했지만 인품이 고매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니 그의 그림이 문인화의 성격을 때때로 강하게 띨 수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모든 화가가 서법을 익혔을 것이나 특히 단원처럼 여러 글씨체에 능할 뿐 아니라 글씨의 원리를 그대로 그림에서 고집스럽게 지킨 경우는 드물다. 그의 그림들의 바위, 나무, 사람과 옷 표현은 완전한 글씨의 획들로 결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화동법의 실천

일찍부터 중국과 한국에는 ‘서화동법’이라는 뿌리 깊은 문인화의 대원리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것은 원대의 조맹부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고 문인화의 기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서예가로 옛법을 두루 섭렵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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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풍미한 송설체가 바로 그의 서체다. 문인들은 늘 붓글씨를 쓰되 그 인품과 학문과 사상의 깊이가 글씨에 반영된다고 했다. 동시에 올바른 서법의 확립과 실천에 큰 힘을 기울였다. 그 서법의 원리가 그대로 그림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니 그림은 글씨의 연장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소위 서권기와 문기가 그대로 그림에 반영된 문인화가 전개되는 계기를 새로이 마련했다고나 할까. 그는 <수석소림도>에 화제를 쓰면서, “바위는 비백과 같고 나무는 주(대전을 말함. 주나라의 주가 정리한 문자로 소전 이전의 문자와 서체를 말한다. 대전의 대표적인 예가 석고문이다)와 같으며 대나무를 그릴 때는 팔법(영자팔법, 永자에 여덟 가지 기본적인 획들이 간결하게 집약되어 있음)을 통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이가 이와 같은 것을 능히 알고 있다면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여러 서체는 사물의 형상을 추상화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글씨와 그림이 하나였음을 안다면 그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법이 발달하고 확립되면서 획의 질을 그림에 그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은 시대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즉 글씨의 필법을 그림에 옮겨 오묘함을 다했고, 화법을 서에 옮겨 정신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글씨가 있다는, 단원의 글씨를 보고 말한 내용은 조맹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단원의 현존하는 최초의 그림 <신언인도>와 최후의 그림이라 여겨지는 <추성부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물화, 산수화, 풍속화, 화훼영모, 사군자 등 모든 화과에 걸쳐 거는 서법의 원리를 일관하고 있다. 그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봉이다.
  

그것은 붓의 뾰족한 끝이 바로 심(心)이요, 그것이 획의 가운데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봉으로 획을 그을 때 그 획은 중량감을 갖게 되고 입체감을 띠게 되어 생명력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한 획은 속도를 조절하여 지면에 각인하듯 반드시 세 번 멈추며 그어야지(三轉折) 단번에 그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획에 호흡(氣)과 힘(生命力)을 유지케 하기 위한 것이다. 깊은 호흡과 힘은 같은 것이다. 그래야 획은 견고함을 유지하며 무한히 계속 나아갈 수 있다.
  

동양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기운생동의 기는 바로 ‘호흡’을 뜻한다. 그리고 삼전절은 말 그대로 평면적으로 미세한 꺽임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종이 속으로 깊이 세 번 뿌리내리며, 한 획을 긋되 새로이 시작하는 세 획이 내면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단원 그림을 자세히 보면 획 하나하나가 이러한 중봉과 삼전절의 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화일치를 결연하게 실천한 대표적 문인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부작난도>에 쓰기를, 20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다가 우연히 그렸는데 비로소 그 난의 본성을 나타내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 그 이전에 그렸던 난초보다 더 못해야 할 것인데 그 난초 그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어찌해서 그럼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20년 동안 결코 난초를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난초를 그리기 위해 글씨를 써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찍이 그는 난초 그리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가깝다고 했고, 아예 화법이 아니라고 했다.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 그러다가 우연히 그린 것이 바로 <부작란도>다! 그리하여 이것을 유마가 내보인 불이선(不二禪 )의 경지에 빗댔으며, 끝에 쓰기를 초서와 예서의 기인한 문자를 쓰는 법(초예기자(草 奇字))의 법으로 난을 그렸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것이며 어찌 좋아할 것인가 했다. 그러니 오히려 ‘우연히’가 아니라 오히려 득의를 얻어서 ‘난초를 썼으며’ 그림이 이루어지기까지 내밀의 과정을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의 오만함이 ‘우연히’란 말로 내 가슴을 친다. 그는 이 난초를 그리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끊이지 않았으며 서법을 닦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난(蘭)그림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면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낸, 희열에 찬 작품이라고 스스로 쓰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그림은 오직 한 번 있는 것이지 다시 그릴 수 없다고 역시 쓰고 있지 않은가. 글씨와 난(蘭)그림은 말 그대로 무애의 경지다. 난을 계속 그린다고 난을 잘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초예기자의 법’은 동기창의 말이다. 그 당시 문인들은 그 말을 모두 알고 있었을 터였으니 오히려 더 자신만만하게 그 원리ㄹㅡㄹ 터득하고 실천했음을 피력한 셈이다.
 
(그림 1) 김홍도, <해암호취>, 조선 1795년 (개인소장)
(그림 2) 김홍도, <오수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3) 김홍도, <남해관음도>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4) 김홍도, <소림명월도>, 조선 1796년 (호암미술관 소장)
(그림 5) 김홍도, <염불서승도> (간송미술관 소장)
 
강우방,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월간미술, 2001)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