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금동사리함 - 진홍섭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4-08-03    조회 : 6009
1977년 4월 2일, 조선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선산(善山) 도리사(桃李寺)의 석조부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육각금동사리함(六角金銅舍利函)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주목의 초점은 물론 금동사리함 자체의 제작기법이나 양식에 쏠리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라시대의 유물이 어찌하여 조선시대의 구조물 속에 수장되어 있었는가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에 대하여도 적지 않은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특히 부도에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의문은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누구나 ‘대체 도리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기에’ 하는 생각부터 가지게 된다. 우리도 도리사란 어떤 절인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도리사는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에 위치하며 선산은 한국불교 초전(初傳)의 곳이라는 점과 아울러 오랜 유서가 있는 절이다. 선산지방에는 지금도 신라시대의 거대한 석탑 2기와 대좌까지 완전한 석불이 전할 뿐 아니라 고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3구가 이곳에 와서 장자 모례(長者 毛禮)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는 신라불교 초전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그 아도와 도리사와의 인연도 깊어 이 절에는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 아도화상석상(阿度和尙石像) 등이 전하고,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석탑이 있다(阿度와 俄道는 동일인이다.).
문제의 ‘세존사리탑’ 또한 그 명칭만 보아도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으나 겉으로만 보아서는 전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던 차에 그 안에서 뜻밖에 금동사리함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도 해명하여야 하겠지만 문제의 석조부도와 금동사리함 자체를 먼저 관찰하는 일이 순서일 것 같다.
  

부도는 작은 방형기단 위에 석종형(石鐘形) 탑신을 올린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형식을 따랐다. 기단은 작고 얕으며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면을 양각하여 옛날식을 따랐다. 탑신은 하단에는 선각으로 앙련을, 상단에는 양각으로 복련을 각각 조각하였고 사륜은 삼각형 일석인데 하단에 앙련을 선각하고 상단에 5개의 원권 안에 ‘세존사리탑’의 다섯 자를 각각 한자씩 조각하였다. 이 부도에서 관심을 끄는 점은 양식으로 보아 그 제작연대가 과히 늦지 않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 추정되며 상륜에 ‘세존사리탑’이라는 글자를 조각한 이례적인 형식에 대해서이다.
이 부도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은 육각형의 독특한 예를 보이며 전면에 금색이 찬란하다. 얕은 기단 각 면에는 고식의 안상(眼象)이 투각되었고 신부(身部)의 각 면에는 사천왕상 4구와 보살상 2구가 각각 선각되었는데 세련된 수법은 아니다. 옥개는 정상에 6판 연화가 받치는 통형의 꼭지가 있고 연판에서 6조의 마루가 추녀로 뻗었으며 끝은 귀꽃이 되어 높이 솟았다. 귀꽃과 각 처마 중간에는 각각 고리가 달려 있는데 아마 원래는 영락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제 문제의 핵심으로 접근하기로 한다. 이 부도는 196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선산지방 유적을 답사할 때까지만 해도 극락전 동북쪽에 있었으나 어느 때인가 도굴배들의 소행으로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뜨려졌던 것을 1972년에는 극락전 뒤뜰로 옮겼다가 1976년에는 다시 극락전 동북쪽 원위치로 복원되었고 1977년 다시 옮기던 중에 뜻밖에도 금동사리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는 곧 현장에 가서 두 유물을 조사하였고 아울러 이 두 유물의 연대가 서로 다른 점에 대해서도 해명을 시도한 바 있다. 그 내용은 『고고미술』(통권 제135호, 1977. 9. 15)에 실렸으나 의문이 풀리지 않은 점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동국대조사반은 「도리사사적기(桃李寺事蹟記)」에 주목하였고 단국대조사반도 그 보고서(『단국대학교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제2책「선산지구고적조사보고서」, 1968. 2. 3)에도 이 사적기를 실으면서 그 속에서 언급한 ‘석옹(石甕)’이 곧 부도라고 하였다. 이 추정에는 잘못이 없으므로 우선 이 사적기부터 볼 필요가 있다. 이 사적기의 「냉산(冷山)」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해봉집의 도리사 석옹기에 이르되 냉산 기슭에 옛 석적사의 터가 있는데 불사리탑이 마을에 사는 김계장에게 현몽하는 바 있어 김계장은 사리 한 개를 얻었다. 크기는 율무만하고 색은 백옥 같으며 빛을 발하였다. 도리사의 중 체안대사가 널리 시연을 구하여 이 석옹탑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이 사적기는 도리사에 보관되어 있고 끝에는 ‘가경12년전 무진8월일 월암문인봉운보신기’라고 제작연월이 명시되어 있어서 조선 순조 8년(1808)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적기의 내용은 『해봉집(海峰集)』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단국대학교 박물관 보고서에는 사적기의 내용만 싣고 그 원전인 『해봉집』까지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국대학교 조사에서는 『해봉집』을 추적한 결과 국립도서관에서 홍명원(洪命元, 173〜1623)의 문집 『해봉집』을 찾았으나 사적기에서 인용한 내용은 없었다고 한다. 이같이 원전을 추적했던 이유는 사적기의 내용에는 석적사지에서 발견한 사리가 과연 사리뿐이었는지, 금동사리함은 없었는지, 그 사리는 어떠한 연유로 도리사에 있게 되었는지, 또 그 석옹을 ‘세존사리탑’이라고 이름지은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주는 기록을 석유기(釋有璣, 1707〜1785)의 『호은집(好隱集
)』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해년 여름에 내가 포주의 유가사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홀연히 도리사 석종의 화주승 득득이 찾아왔다.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선산 냉산 기슭에 석적사의 옛터가 있고 그곳에 또 석탑이 있는데 진토에 묻혀서 정수리만 약간 나타나 있었고 간혹 서광을 발하였다. 나무꾼 김계장이 이상한 꿈을 꾸었고 그로해서 탑 밑에서 금함과 사리 1매를 얻었다. 사리의 색은 백옥색이고 크기는 율무만 하였다. 금함의 모난 면에는 8금강과 4보살이 조각되어 있어서 석존의 사리임이 분명하여 도리사에 바쳤는데 이 일이 있은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상서로움이 여전하였다. 금년 봄 득득이 권유하여 물력을 모아 윤4월에 장인을 불러서 탑을 만들고 향과 함께 수장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내력을 글로 적어놓지 않으면 뒤의 사람들이 어찌 오늘의 일을 알겠는가.

이 내용은 『호은집』 권1에 ㅊ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글이다. 사적기에서 인용한 『해봉집』의 기록과 『호은집』의 기록을 비교하면, 『호은집』의 내용을 『해봉집』에서 발취하여 요점만을 취하였음이 분명하며 발췌는 『해봉집』자체에서가 아니라 사적기 저자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책 이름이 다른 두 가지 문집에 이처럼 같은 내용이 실릴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본 제목과는 직접 관련은 없는 일이지만 해명해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호은집』이라는 제목의 문집에는 「해봉집서(海峰集序)」, 「호은우부자전(好隱愚夫自傳)
, 「해봉대사영찬(海峰大師影讚)」 등의 글이 아울러 실려 있다. 이들 내용에는 『호은집』과 『해봉집』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들어 있다. 즉 「해봉집서」에는

스님은 법명이 유기이다.(중략) 스님은 앞서 스스로 자를 호은이라고 지었다.

이라 하였고 「해봉대사영찬」에는

호은집은 해봉 스님의 저술이다.

라고 있어서 사적기에서 인용한 『해봉집』이란 곧 ‘석유기’ 혹은 ‘해봉상인’의 저술인 『호은집』을 가르키는 말이고 『호은집』에는 사적기보다 더 자세하게 금동사리함과 세존사리탑과의 관계가 기술되어 있다.
이상으로 도리사 세존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한 금동사리함에 관한 문제를 풀어보았으나 그래도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이들 의문점 중에는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도 있으나 양해할 수 있는 선까지는 가보도록 시도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첫째, 석적사지에 석탑이 묻혀 있는데 간혹 서광이 비쳤다는 점, 이상한 꿈을 꾼 것이 금동함을 발견하게 된 동기였다는 점 등이다. 그 내용은 황당하나 이와 유사한 설화는 불가에서 이변이 있을 때 예외 없이 ‘서광(瑞光)’과 ‘몽조(夢兆)’가 수반하는 이적이 따르게 되므로 이 경우도 그러한 사례로 생각하면 될지 모르나 발견하였다는 금동함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한 구석에 남은 석연치 않은 점을 씻어버릴 수가 없다.
둘째, 꿈의 내용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사리함은 필시 절터에 묻혀 있던 ‘석탑’속에서 발견하였으면서 석탑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사리함이 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보면 그것이 들어 있던 ‘석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사리함에 버금가는 관심사였을 것임에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만 것은 유감천만한 일이 아니할 수 없다. 지금에 와서 석적사지를 찾고 또 석탑을 찾아서 발굴조사를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아마도 이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될 것 같다.
셋째, 금동사리함에 관해서 발견자는 ‘팔금강사보살’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사천왕이보살’이어서 서로 맞지 않는다. 이 문제도 발견 당시에 눈에 뜨인 조각상의 종류를 꼼꼼히 따지지 않고 보통 불가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깊이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넷째, 해봉의 재세시기는 숙종 33년(1707)에서 정조 9년(1785)까지이며 득득(得得)에게서 사리 발견의 소식을 들은 해는 ‘계해’년, 즉 영조 19년(1743), 그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고 득득이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한 해도 ‘계해년 윤4월’이었다. 이러한 절대연대에서 석종의 양식을 비교하면 18세기 중엽의 석종으로는 상당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시대 부도 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에도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상으로 도리사의 ‘세존사리탑’과 ‘금동사리함’에 관한 문제를 마치기로 한다. 끝으로 연구자를 위하여 『호은집』에 있는 「해봉집서」와 「호은우부자전」 두 편의 원문 가운데 일부를 실어둔다(이하 원문은 생략. 연구 자료 소개 난의 『호은집』의 「도리사석종기」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진1)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
사진2) 아도화상 사적비 및 불량탑 시주질비
사진3) 세존사리탑

* 진홍섭, 「도리사 금동사리함」, 『묵재한화』(대원사, 1999)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