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털어놓는 에밀레종 이야기(1) - 정양모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4-05-03    조회 : 6419
  
엄청나게 큰 소리는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 무게가 23~25톤, 높이가 3미터 75센티, 구연부(口緣部) 지름이 2미터 25센티, 두께가 11~25센티의 산과 같이 우뚝한 저 종에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을까. 영롱하고 맑다는 표현만으로는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그려낼 수가 없다. 낭랑하고 깨끗하면서 웅혼하며 거룩하다. 사람은 한평생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 이가 몇이나 될까.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있는 이가 들으면 문득 법열의 경지에 이르러 득도할 것이며, 보통 사람이나 나무꾼이 들어도 누구나 희열의 경지에 이르러 그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새벽잠에서 막 깨어나려 할 때 꽝 하고 울리는 희열의 종소리가 마음속으로 퍼져 들어왔을 때 그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순화된 마음은 아마 진정한 의(義)에의 희열이라고밖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은 인왕동에 있으며 월성의 바로 동쪽 방면이다. 원래는 경주 시내 한복판인 동부동의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 터에 있었다. 1975년 7월 2일에 현재의 새 청사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였던 옛 자리는 5백년이 넘은 큰 은행나무가 뒤뜰에 있었고, 내동헌(內東軒)이라 불리는 관아 건물과 목조 한옥 몇 채가 있었으며, 그 한쪽에 종각이 있었고 정원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와 흰 철쭉이며 아름드리 모과나무가 있었다. 구관 대지가 모두 1200여 평인데 그 속에 갖은 신라 유물이 아기자기하게 건물 속 고물 진열장에, 그리고 나무 밑에 놓여 있었다.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 에밀레종)은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한쪽 구석 종각에 달려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매일 새벽이면 종이 울렸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경주 시내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았고, 새벽이면 더욱 조용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었다. 겨울 종소리와 여름 종소리는 다르다. 겨울 종소리는 차고 맑으며, 여름 종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나는 여름 종소리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대종을 구관에서 새 박물관 종각으로 옮겨 다는 큰 역사가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종이라 하나 요즘은 신식장비도 많고 기술도 상당하니 옮기고 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저 신성하고 위대한 종을 어떻게 하면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여 새 박물관으로 모셔 가서 새 종각을 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도 경주의 남녀노소 모든 시민이 한 마음이 되어 스님도 시장님도 경찰서장님도 우체국장님도 누구나 발벗고 나서서 몇 년 기획하고 몇 달 준비하여 무사히 종을 옮겼다.
종을 옮기는 기술적인 일을 맡은 이는 대한통운 중기부 여러분이었다. 참 고맙고 어진 분들이었다. 어떠한 요구도 어떠한 주문도 모두 받아들여 종을 옮기는 데 터럭 끝만큼 한 소홀함이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종을 새 종각에 달려고 생각해보니까 콘크리트 건물이 저 위대한 종을 과연 잘 모실 수 있을까, 혹 시공이 잘못되어 보가 내려앉거나 꺾여 종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또 종고리가 잘못되어 휘거나 부러져 종이 떨어지지나 않을까하고 밤낮없이 걱정되었다.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특별히 청하여 28톤 무게의 강철 덩어리를 빌려다가 새로 지어놓은 종각에 달아놓았다.
강철 덩어리 28톤을 달아놓고 흔들어 보고 올라가도 보고, 고리도 살펴보기를 수백 번 하였다. 시공자와 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였다. 신식 기술과 자재로 만든 종각과 종고리에 절대로 이상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철 덩어리를 매단 지 이레부터인가 트집이 나기 시작하였다. 신관공사 관계자가 그렇게 장담하던 종고리가 휘고 벌어져서 그대로 매달아두면 며칠 못 가서 강철 덩어리가 떨어질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열흘 만에 강철 덩어리를 내렸다. 천만다행으로 종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종각에서 떼어내면서 그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공사 관계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민족 모두에 대한 자책이었다. 우리 민족 모두의 정성을 담아 길이 보존하여야 할 이 종을 달아야 할 핵심인 고리가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우리 세대를 사는 모든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일그러진 고리를 붙들고 부르르 떨었다.
열댓 관쯤 되는 일그러진 고리를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져다가 고리에 이상이 있다고 해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 앞에 펼쳐놓았다. 일순 아무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한 얼굴을 추스르지 못했다. 누군가가 “이런 죽일 놈들……” “이놈들을 당장 잡아다가……” 하고 신음하듯 말했다. 공사담당 회사의 사장, 전무, 현장 감독, 공사 감독관 들이 모두 불려와서 사색이 되었다. 펄펄 뛰면서 이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해도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그 길로 일그러진 고리를 가지고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재질을 실험하였더니, 시험한 연구원이 “이 쇠는 뚱쇠(찌꺼기 쇠로 만든 쇠)입니다”라고 하였다. 만일 포항제철에서 강철 덩어리를 쾌히 빌려주지 아니하였다면 또 대한통운 중기계장 이용일 씨, 작업반장 김창배 씨 외 여러분이 작업비 받을 생각도 않고 강철 덩어리를 실어다 매달아 주지 아니하였던들 성덕대왕신종은 땅에 떨어져 깨지는 비운을 맞았을 것이요, 우리 민족의 양심과 자존심은 허공으로 날아가야 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인 성덕대왕신종을 거는 작업이니까 공사담당 업자도 이것만은 의당 잘했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시공업자는 유명한 토목건축 회사이니 아니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시골 박물관 관장이 강철 덩어리를 빌려다가 달아맨다, 실험을 한다 하고 부산을 떠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실험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당장 종고리를 제작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 박사와 금속실장 황창규 선생 등 과학자와 박물관 관계관 몇 분이 위원이 되어 고리를 어떻게 만들어야만 안전하겠는가에 대한 심의가 오래 두고 진행되었다. 황 실장과 자주 만났다. 한 달이 가도 결론이 나지 아니하였다. 황 실장의 말 중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핵심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종의 무게가 25톤 가량이므로 종을 거는 고리는 50톤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찬 바람이 불면 종이 약간씩 흔들리기 때문에 정지상태보다 두 배의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종은 종머리 부분이 중국이나 일본, 아니 세계 어느 나라 종에도 없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종머리에 음관(音管)이 있고 용트림을 한 종고리가 달려 있다. 음관은 종머리 한쪽 옆에 있고 종고리가 음관을 싸 감으면서 종머리의 중심에 있다. 종을 걸어 지탱하는 것은 고리 모양으로 된 용트림의 등허리이다.
결국 휘어 구부러진 용의 등허리에 쇠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쇠막대기 양쪽을 달아매야 하는 것이다. 이 쇠막대기의 직경이 최소한 15센티는 되어야 50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 아니면 안 되며, 황 실장이 지정하는 실력 있는 공장에서 황 실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고리 부분인 용의 휘어진 등허리의 안쪽 직경이 9센티 미만이란 점이다. 15센티가 아니라 50센티나 되는 아주 든든한 철봉을 만들었다고 해도 종고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이 벽에 부딪혔다. 세계의 모든 강철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도 직경 15센티 이하의 쇠막대기로는 50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갖은 방편이 다 나왔지만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아니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황 실장이 경주에 와서 “관장님, 그럼 전에는 이 종을 어떻게 달아놓았습니까”한다. “그 전에는 옛날 철봉에 매달았지요” 했더니, “바로 그겁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도 언뜻 생각이 떠올라 구관에서 종각을 해체하고 종을 매달았던 쇠고리를 모두 그대로 금고에 잘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황 실장에게 바로 보여드렸다.
구관에서 종을 달고 있던 쇠막대기는 1915년 봉황대에서 동부동으로 그 종을 옮겨온 후 최소한 60년은 종을 무사히 달아맸던 것이다. 좀 길게 잡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몇 백 년, 또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면 1200년을 버틴 철봉이다. 이 철봉을 살펴보니까 우그러지지도 않았고 터럭 끝만큼도 휘지 아니하였다. 황 실장이 득의만만하여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이것이 안전하다는 것은 경험으로 증명됩니다. 지금의 금속공학으로 만드는 직경 15센티 이하의 쇠막대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결국 신종을 다는 철봉은 옛날 우리 선조님네가 만든 그 철봉을 이용하였다. 그 봉을 천장에 매다는 데 필요한 고리는 황 실장의 특별 배려로 달포에 걸쳐 서울에서 다시 만들어왔다. 그 전에 만든 고리는 전체 무게가 15관이었는데 새로 만들어 온 것은 1.5톤이나 되었다. 두께 3센티의 철판, 직경 10센티의 철봉, 직경 5센티의 특수 나사 등이었다.
설계를 다시 하여 완전히 종각의 윗부분을 해체하고 거기 구멍을 뚫고 철판으로 싸감고, 거기서 윗고리를 가로지르고 다시 상하로 구멍 뚫린 두께 10센티의 철판을 드리웠으며 제일 밑의 작은 구멍에 직경 8센티의 옛날 쇠막대기를 가로질러 종을 달았다. 지금(1987) 인왕동 새 종각에 종을 건지 만 십년이 조금 넘었다. 매일 새벽 종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계속)

사진1)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탁본
사진2) 성덕대왕신종
사진3) 성덕대왕신종 용뉴

※ 정양모, 『너그러움과 해학』(학고재, 1998) 중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