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4) 금어-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12-21    조회 : 7045
  
멀리 기적이 들려왔다. 산이라기에는 너무 세(勢)가 순하고, 언덕이라기에는 높은 그런 멧부리가 대바구니처럼 둘러선 골짜구니 길을 혼자서 걸어갔다. 대한(大寒)을 바라보는 날씨는 따뜻하여 이마에 땀이 배고 북으로 트인 골짜구니에는 소춘(小春)이 소복이 담겨 잠시 겨울을 잊게 한다. 치송(稚松) 하나 없이 풍화한 수성암(水成岩) 메를 오르노라면 휜히 안계(眼界)가 트이고, 카랑한 겨울 하늘 아래 대구 시가는 멀리서 질펀하다.
그 양지바른 마루턱 가까이에 장수사(長壽寺)는 오향(午向)으로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인근 가난한 농민들의 신심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듯한 원사(願寺)인 장수사는 법당이 와가 삼간(瓦家三間), 나머지 집들은 두 채 있으나 허술하였다. 불화(佛畵)를 잘한다는 김일섭(金日燮, 63세) 화상(和尙)을 찾으니 이른바 ‘몸뻬’에 양복저고리를 입고 수건을 쓴 뚱뚱한 부인이 나와 “스님은 시내 신흥사(信興寺), 부처님이 금을 잡수시는[鍍金] 데 가셨습니다” 하며 웃는다. 차림은 아무렇게나 했을망정 다복스레 생긴 중년부인이었다. “스님이 영감님이라”고 하면서 내일 이맘때를 기약하고 돌아섰다.
다음날, 먹물을 들인 장삼(長衫)을 입은 김일섭 스님은 합장배례 벗겨진 머리를 조아리며 맞아주었다. 이쪽이 무안하리 만큼 공손한 첫 대면이기는 하였어도 그를 만나고자 벼르기 1년유 반(一年有半), 이제야 겨우 원이 이루어진 셈이니 일면어구(一面如舊)의 느낌이다. 그의 거소(居所)를 알아볼 양이면 언제나 불사가 있는 사찰을 전전하여 운수와 같은 자취를 찾기 힘들더니, 정작 만나려 들면 이렇게 쉬운 것이니 어떤 연분의 소이인가….
그는 법명(法名)을 퇴운(退耘)이라 하고 14세에 삭발,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입산했다. 가세가 어려운 농가의 독자로 태어났으나 불문(佛門)에 들어야 장수한다는 말을 믿은 부모들은 유명(幼名)을 수연(壽延)이라 불렀고 마침내는 속연(俗緣)을 끓게 했다. 외롭게 성장한 그는 절에서도 외로웠다.
그래서 송광사 벽면 해묵은 불화-불가에서는 불화를 탱화(幀畵) 또는 만다라(曼茶羅)라고 하며, 불화를 그리는 승려를 금어(金魚)라 이른다-를 바라며 아침저녁 대자대비 언제나 고졸(古拙)한 웃음이 가시지 않은 아름다운 부처님들의 모습을 마음의 벗으로 삼았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처님 그리는 정에 모자랐다. 그 모습을 옮겨보고자 붓을 들었다. 백지에다 그리고 또 그렸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금어로서의 첫길이었다. 금어가 되려면 시왕초(十王草), 보살초(菩薩草), 여래초(如來草), 천왕초(天王草) 해서 초화(草畵)만 각 1,000장씩 4,000장을 그려야 한다. 여느 승(僧)이 참선 또는 예불(禮佛)을 할 때 그는 초화의 붓을 놓지 않는다. 시왕, 보살, 여래의 각 초화는 하루 10장 꼴로 독력(獨力)으로 익히고, 21세 때 근세 탱화의 명인 김보응(金普應) 화상에게 사사하고자 안양암(安養庵)으로 갔을 때는 하루에 2장을 그리기가 힘든 가장 어려운 천왕초만 익히라고 할 정도로 필력이 오르고 기(技)에 숙달해 있었다.
김보응 스님에게서 얼마를 하다가는 문고산(文古山), 이만총(李萬聰) 등 당대 명인의 문하를 전전, 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 사찰을 두루 훑으며 오랜 탱화들을 눈으로 보고 연구를 거듭했다.
탱화에 있어서는 백지에 붓으로 그리는 초화만 되면 나머지 채색 구멍 메우기는 쉽다. 일정한 법도에 따라 원색(元色)인 장단(章丹), 초청(初靑), 이청(二靑), 삼청(三靑), 황(黃), 양록(洋綠), 주홍(朱紅), 석간주(石間硃), 분묵(粉墨), 하엽(荷葉), 조색(調色)인 육색(肉色), 다자(茶紫), 옥색(玉色), 지황(地黃), 석웅황(石雄黃), 청화묵(靑華墨), 연지(臙脂) 등등 광물성 또는 식물성 채색을 아교풀에 풀어서 칠하면 된다는 것이다.
말이 없는 편인 그는 가는 붓으로 큼직한 백지에 그린 부처님들의 초화를 한 장 한 장 들추며 차분히 설명을 한다. 허술한 법당 안은 추웠다. 화로에 언 손을 얹어 녹히고는 초화 1장을 들추고 설명하고 또 화로에 손을 얹고 하는 것이었다.
탱화, 즉 만다라는 밀교(密敎) 계통에서 전용하던 바이기는 하였어도 여러 가지 불화를 축(軸)에 그려 불법을 나타내어 가람(伽藍)을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불각(佛閣)에는 불상을 안치하는 것보다도 만다라를 거는 일이 흔한 것이다.
산문(山門)을 들어서면 호지문(護持門)이 있어서 양측에 사천왕(四天王)이 서고, 정면에 대웅전이 우뚝 자리잡아 석가여래를 안치하고 좌우로 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을 앉힌다. 대웅전 옆으로 팔상전(八相殿)이 있어 석가 팔상(釋迦八相)의 만다라를 모신다. 명부전(冥府殿)에는 지옥의 모습을 나타내어 지장보살(地藏菩薩),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子) 및 시왕을 안치한다. 이밖에 가섭(迦葉), 아난(阿難)의 양 존자를 더하여 전명(殿名)을 영산전(靈山殿)이라 하는 수도 있다. 염불당(念佛堂)에는 미타(彌陀)와 관음(觀音), 대세지(大勢至)의 삼체(三體)를 그리고 선방(禪房)에는 석가상을 안치한다.
이밖에도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동방의 여래이니 만큼 각(閣)을 세워 모시는 수도 있으며, 칠성각(七星閣)에는 북두칠성을 받들어 사람의 연명(延命)을 빌게 한다. 산신각(山神閣)에는 범을 탄 산중(山衆)을, 신중단(神衆壇)에는 제석천(帝釋天)과 104위(位) 또는 39위의 호법신장(護法神將)을 봉안한다.
법당 안의 만다라는 위와 같이 제여래, 제보살을 비롯하여 석가 팔상, 화엄회(華嚴會), 수륙대시아귀(水陸大施餓鬼), 제석천과 신장, 지장, 관음, 나한(羅漢), 칠성,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 산시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많을 뿐만 아리나 그 극채색의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에 녹슨 당탑가람(堂塔伽藍)의 장엄을 한결 더하는 것이다.
만다라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괘불(掛佛)로서 이는 영산회 같은 대법회가 수일간에 걸쳐 있을 때에는 법당이 좁아 뜰에 단(壇)을 모으고 석가, 문수, 보현을 그린 만다라를 세우는 것으로, 때로는 크기가 길이 50척, 폭 35척에 이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 가장 보편적인 탱화는 후불(後佛), 지장, 관음, 신장과 시왕, 팔상, 나한, 칠성 등 각 부 및 구품(九品), 감로(甘露) 등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의 후불인 경우에는 좌우보처(左右補處)에 관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놓고 그 다음으로 문수, 보현, 금강, 지장 등 육광보살(六光菩薩)을 그린다.
석가여래불의 후불은 좌 가섭, 우 아난 외에 10대 제자(十大弟子)와 사천왕을 그리는 것으로, 그 변화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탱호, 개금(改金), 조상(造像), 주종(鑄鐘) 및 법당의 신축과 같은 불사가 있을 때에는 고덕(高德)한 증명대법사(證明大法師)를 모시고 회주(會主), 지전(持殿), 송주(頌呪)의 각 법사(法師)와 금어, 종두(鐘頭), 공사(供司), 별좌(別座), 도감(都監), 화주(化主), 시주(施主) 들이 줄줄이 늘어앉아 장엄을 다하였다.
특히 금어가 산중도량(山中道場)에서 탱화를 그릴 때면 먼저 목욕 재계, 새 옷을 갈아입고, 금토(禁土)를 뿌리고 금줄을 치고, ‘금번불사 종초지말 무장무애 환희원만 성취지대원(今番佛事 從初至末 無障無碍 歡喜圓滿 成就之大願)’을 세워 신장불공(神將佛供)을 올린 다음에야 붓을 들어 정혼(精魂)을 쏟았노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소위 금어도 그러하거니와 탱화를 청하는 사찰측도 흥정에만 능해져서 기일을 짧게 잡아 독촉도 하고 값을 깍기도 하고 하여 일에만 정진할 수가 없어 본말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사이비류가 횡행하여 사자상전(師資相傳) 천년을 두고 향내 높던 불교예술의 자취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노라고 탄식, 탄식하는 것이다.
이 사이비류는 싼 값으로 일을 날려서 하니 불사를 부탁하는 측에서도 그리로만 기울어져 제대로 법도에 맞추어 꼼꼼히 하는,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금어들은 세상에 발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서 이해가 없으니 외롭기는 예나 다름없어도 나이들수록 부처님 그리는 마음은 더해간다고 웃으며,
“삼비오안(三鼻五眼)은 부처님의 얼굴을 그리는 원칙으로 얼굴의 길이가 코 길이의 세 갑절이며, 너비는 눈매 길이의 다섯 배이며, 신장은 얼굴의 여섯 배 반이라”고 설명을 쉬지 않는다.
탱화의 세계에서는 미인의 기준이 팔등신이 아니고 육등 반신이었던 모양이라고 좀 지리한 김에 혼자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추근한 말은 계속된다.
“탱화가 다 되어 마지막 어려운 고비인 개안미소(開眼微笑), 부처님의 웃음진 눈매를 그리고 났을 땐, 저도 모르게 법열삼매(法悅三昧)에 젖는다.”고하며 불손으로 화로의 불을 다둑거린다. 멀리서 오정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낮때가 되었던 모양이다.
(1962년 1월 22일)

사진1)금어 김일섭
사진2)직지사 대웅전 후불탱 초본
사진3)금강사 석가모니후불탱,1953년,금어 김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