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3) 단청-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12-08    조회 : 5409
  

괴목(槐木) 짙은 숲 아래 탑골승방(동대문 밖)은 낮벌레소리가 들린다. 낙산(駱山)…… 발 아래 여울지는 기와이랑 만경(萬頃)은 승방 불당의 새 단청을 떠받쳐 도심의 소음은 멀리 비켜섰다. 지금 단청이 올려지고 있는 경내 칠성각(七星閣) 앞뜰에서면, 목면 고의 적삼의 소매를 반만 걷고 산자 위에서 천장을 우러러 조용히 붓을 움직이는 중년 승려가 있다. 운필삼매(運筆三昧), 인기척에 아는 체가 없다. 왼편 귀뒤의 돌배만한 혹이 인상적이다. 이윽고 공손히 합장, 이만봉(李萬峰, 61세) 스님은 그제야 온 뜻을 묻는 것이다.
단청의 발상은 중국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낙랑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고증의 길은 없다. 이래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발달을 했다. 같은 당초문(唐草文) 하나만 보더라도 중국 것은 듬직하고 대범하나 우리것은 날씬학고 섬세하다.
단청은 건물을 장엄하고 풍화를 막는 구실을 한다. 한말로 해도 건물에 따라 단청의 종류도 다르다. 사찰에는 가장 정교한 공이 들고 금(錦)처럼 아름다운 ‘금(錦) 단청’, 비각(碑閣) 사당(祠堂)에 ‘얼금단청’, 궁전 성곽에는 무늬가 크고 대범한 ‘모루단청’, 또는 ‘얼머리단청’,‘긋기단청’을 각각 올린다. 이와 같이 새로 올리는 단청은 ‘신단청’이라하고, 중수시 주위의 낡은 단청과 같은 퇴색한 색을 내는 단청을 ‘땜단청’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와 같이 당초부터 예스런 맛을 내기위해 풍화한 색조를 올리는 것을 ‘물단청’이라고 이른다.
서울태생의 만봉 스님이 단청을 배운 것은 7세 때 출가하면서부터였다. 스승은 4년 전 90수(壽)로 입적한 예운 선사(藝云禪師), 아침저녁 손에 잡듯 ‘일’을 가르쳐준 좋은 스승이었다고 한다.
  

단청의 그 고유한 빛깔은 다채하다. 뇌록(磊綠, 회록색), 녹청(綠靑, 녹색), 녹삼(녹삼, 백록색), 삼청(三靑, 백군청색), 진청(군청색), 하엽(荷葉, 암록청), 석간주(石間硃, 붉은 흙빛), 번주홍(燔朱紅, 진홍색), 연지(燕脂, 홍색), 주홍(朱紅, 홍색), 다자(多紫, 암주색), 진분(眞粉, 순백).
대별해서도 10여 종-옛날 중국에서 들어오는 당채(唐彩)는 금값과 맞먹었다. 당채 한 근과 금 한 근이 교역된 것이다. 따라서 단청을 올린다는 것은 그래도 금을 입힌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터운 신앙과 무거운 세도 아니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이 당채단청 중에서는 가장 값진 것이 ‘옻단청’이며, 다음이 ‘들기름단청,’보통단청‘의 순이다. 6.25에 소실된 청평사의 ’옻단청‘은 수백 년이 지난 오른날까지 그 현란한 채색이 눈부셨다. 문양에는 금, 은분 및 산호, 진주분 등이 두드러지게 올려져 단청미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국보적인 가치의 것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단청미는 다양한 색채와 아울러 다기한 문양의 조화가 빚는 아름다움이다. 금문(錦文)을 비롯해서 기화(奇花), 운학(雲鶴), 신선 등 그 문양미의 변화는 이루 형언할 길이 없다. 구름문 하나를 예로 들어도 운문(雲文), 점운(點雲), 유운(流雲), 기운(起雲), 완자운(卍字雲), 풍운(風雲), 비운(飛雲), 사운(絲雲), 채운(彩雲), 오색운(五色雲) 등으로 나누어진다.
단청을 하기 시작한 이래 금강, 묘향, 지리 등 명산대찰에서 늙어온 만봉스님은 “단청일을 배우려면 10년 적공(積功)은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단청의 초화(草畵)인 초상(草像)에서 가칠(假漆), 골채, 기화(起畵), 빛넣기, 초빛, 이빛, 공터넣기, 바름질, 별화 등 단청일을 익히기는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손끝으로 익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건습(乾濕)의 차가 심하면, 밑칠과 위칠의 강약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단청이 벗겨지지를 않는다. 그 ‘일’의 호흡을 익힌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노릇이 아니다. 일을 배우려면 우선 물욕에서 떠나야 한다. 단청을 만지고 있다가는 그날 살기가 곤란한다. 10여 년을 두고 이 고행을 참는 데는 수험자의 인고가 필요하다. 타산으로 사는 요즘, 세상에서 이 일을 뜻할 새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고 만봉스님은 한숨짓기도 한다.
  

제대로 단청의 법통을 이은 분도 만봉 스님 짐작에 지금 5,6명 내외가 생존했을까말까 한데, 그분네들도 다 내일을 측량할 수 없는 노경(老境)이다.
더욱이 한심스런 것은 ‘뼁끼’칠이나 할 사람들이 단청을 한답시고 전국 명소의 고적(古蹟)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실로 견디기 어려운 통탄할 일이다.
“단청을 해야 할 사찰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시초부터 예산이 모자라 단청을 한 수고비를 못 받을 것이 분명해도 일을 하는 수가 허다하다. 부처님을 백골(단청을 올리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로 모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이 중(僧)된 도리이기도 한 것이다.”
담담한 표정과 박눌(朴訥)한 말 속에는 조금도 인위로 조작된 꾸밈새가 없어 좋다. 지금도 일을 할 때면 목욕재계, 향을 피워 잡념을 가시고 난 다음에야 단청의 붓을 든다고 한다. 몸은 극채색의 단청 속에서 살았건만 이토록 소박할 수 있었던 인품도 예술을 위하는 그 경건한 자세에서 연유했으리라.
하직을 위해 또 한 번 합장하는 만봉 스님 머리 너머로 아득히 우러러지는 단청-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금시 날아갈 듯 깃을 편 부연(浮椽)의 단청은 서역(西域) 만리 극락정토로 연(連)하는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1960년 7월 18일)

사진1)인간문화재 단청장 이만봉
사진2)불국사 단청
사진3)용주사 단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