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2) 와장-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11-27    조회 : 5138
장마구멍에서는 뻐꾸기 울음도 허사였다. 가야산중에서 폭우를 피한다고 들른 노릇이 이승(尼僧) 두 분이 지키는 오랜 암자였다. 비는 날이 저물어도 개지 않았다. 외진 승방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시주도 없을 산중의 말사(末寺)라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겠으나, 그래도 저녁에는 산채에 뜨끈한 보리상반밥을 정성스레 차려내었고, 방에는 누기가 찰세라 어느새 불까지 지펴주었다. 만산(滿山)에 물소리-그 물소리를 들으며 이승들의 친절을 생각하고, 그리고 곤한 잠에 들었다.
다음날도 진종일 비가 구질거렸다. 이따금은 폭우가 섞였다. 암자 앞 계곡에 걸린 외나무다리가 끊겼다는 애기였다. 와선(臥禪)으로 덧없는 하루가 간다. 사흘째 아침나절에 폭우가 한 바탕 내리더니 동이 훤하면서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다.
이제는 된 것이다. 나무 다리들이 죄 떠내려가서 짙은 숲 사이 오솔길을 타고 가야 하는 두름길이 숨가빴다. 비가 멎었다고는 하나 이슬이 비오듯하여 차림은 함빡 젖고 말았다. 거기에다 하늘이 어두워오더니 비는 노드리듯이 또 내리기 시작한다. 얼마를 걸었는지 빗속에 서서 와장(瓦匠) 이우묵(李愚黙 70세) 옹이 산다는 마을 ‘마쟁이’를 물으면 10리가 남았다고 한다. 비는 좀체 그칠 것 같지 않다. 장마에 지친 뻐꾸기가 아마도 변덕을 부렸던 모양이다.
  

이옹은 마굿간에서 작두로 저녁 여물을 썰다가 손을 털면서 나왔다. 귀를 덮은 반은 희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며, “우중(雨中)에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숱이 많은 탓인지 굵직한 상투가 머리 꼭대기에 도사리고 앉았다.
본관이 어디며, 나이가 몇이며, 어느 고을의 사람인지부터를 먼저 캐묻더니 대뜸,
“내 자네 보고 자네라고 하네.”했다.
옹은 스스로를 일컬어 기와일에는,
“전국에서 내가 제일이지, 나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네.”라고 서슴치 않았다.
일찍 거창의 어느 빈농가에 태어났다. 서당에 다녀본 일도 없고 일만 하다가 20세 나던 해 외도(外道)로 나섰다(이 외도는 요즘 흔히 쓰는 의미의 외도가 아니라 출타의 뜻 정도로 쓰는 것 같았다). 거창에서 흘러 흘러 안동(安東) 어느 동리에서 그의 스승이 될 ‘히보살’을 만났다는 것이다.
히보살은 장삼(長衫)과 가사(袈裟)를 입은 출가의 몸이었으나, 평생을 기와일로 늙은 분이었다. 키가 늘씬하게 크고 두련한 얼굴의 원만구족한 도승이었다. 그때 이미 칠순 노인이었다. 히보살 아래서 일 시종을 들며 와장의 길을 닦았다.
잘못이 있어도 꾸짖는 일이 없고 언제나 순순히 타일렀다. 일이 끝나면 염주 만지기와 송경(誦經)을 일로 삼았고 주색을 멀리하여 도심이 견고했다. 처자권속이 없는 축가라 일이 있으며 사찰이든 속가이든 가리는 일이 없이 와장으로서의 일을 사양치 않았다. 자연 수입이 많았으나 돈은 생기는 대로 어려운 사찰에 푼전(分錢)을 남기지 않고 시주를 했다. 금전에 애착이 없는 분이었다.
정든 스승 히보살과 작별할 때가 왔다. 7년 후 히보살은 상주(尙州)에서 객리(客里)에서의 임종이었으나 호상(豪喪)과 다름없었다. 히보살의 인품에 감화되어 와장을 업으로 한 집도 절도 없는 승려의 상사(喪事)인데도 동인(洞人)이 다 들고 일어났다. 그가 열반상을 보이자 친어버이처럼 섬기던 3,4인의 제자들이 슬픔을 가누지 못해 곡성이 터져오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듯 히보살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스승이건만 그가 어디 사람이며, 입적(入寂)할 때의 나이며 법명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세상이 부르는 히보살이라는 이름 외에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히보살이 우리나라에서 첫째였는데, 그가 돌아간 다음은 수제자였던 옹이 우리나라에서 첫째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이옹은 친상을 단한 것과 다름없이 3년을 내고 팔도강산, 일을 따라 떠다녔다고 한다.
그는 기와를 굽는 일이나 이기는 일이 모두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이력이 나서 손에 익고 눈에 익기 전에는 별 도리가 없다. 단지 기와를 굽는 데는 흙이 중요한다. 흙은 이것저것을 섞어서 기왓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흙을 써야 한다. 흙 속에 철분이 많이 섞여 있어야 기와가 단단하다. 그래서 흙을 얻기 위해서 고생을 하게 된다. 철분이 많이 들었는지의 여부는 흙을 바가지로 일어보면 안다.
남한 일대에서 의령(宜寧) ‘개포’의 흙이 가장 좋다.
기와를 구울 때는 땅에 굴을 파고 흙으로 만든 기와를 굴 속에 재어서 밤낮 열흘을 불을 때야 한다. 솔가리 150짝이 든다.
기와 종류에는 양옆이 위로 흰 ‘암키와(女瓦)’와 암키와 사이를 덮는 반원통형의 ‘수키와(夫瓦)’가 있다. 처마 끝에 사용하는 기와를 ‘막새’라고 하며, 막새는 암,수로 갈라진다. 특히 마루 끝에 세우는 우뚝한 암막새를 ‘망와(望瓦)’라고 하며, 적새 밑에 기왓골을 막는 수키와를 ‘착고(着高)’, 그 위에 이중으로 얹힌 수키와를 ‘부고(付高)’라고 한다. 마루를 덮어 쌓은 암키와를 ‘적새(積瓦)’라 이르고, 박공머리에 얹힌 암키와를 ‘너새기와’, 박공솟을 각 끝에나 추녀 끝에 쓰이는 세모꼴 암키와를 ‘왕자기와’라고 한다.
  

특수한 것으로는 종마루 양단에 세우는 ‘취두(鷲頭)’, 종마루나 귀마루 위에 얹힌 ‘용두(龍頭)’, 역시 종마루 양단에 세우는 ‘귀두(鬼頭)’, 취두 측면이나 사래 끝에 붙이는 ‘귀면(鬼面)’, 사래 끝에 끼우는 용두형이나 귀두형의 장식인 ‘토수(吐首)’, 궁전 등 귀마루 위에 얹히는 신상(神像)인 ‘잡상(雜像)’, 사모정, 육모정 등의 지붕 꼭지에 얹히는 탑형의 장식인 ‘절병통(節甁桶)’ 등등이 있으나 흔히 쓰이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기와를 슬 만큼 굽고 나면 물미를 잡아서 한쪽 머리부터 부토를 놓고 암키와를 줄줄이 얹은 다음 암키와 사이에 흙을 놓고 수키와로 덮어 내려간다.
이렇게 적으면 말로는 쉬우나 한바다처럼 넓은 기와이랑이 오뉴월 장마통에도 비 한방울 새지 않고, 또 보기에도 바둑판에 돌을 실을 것처럼 아름답게 잇기란 최소 10년의 연공(年功)은 쌓아야 한다. 이 일이 몸에 익으면 암만 높은 지붕 위에 있어도 평지에 있는 것과 같다.
지금도 생각하는 것은 소위 차천자(車天子)가 보천교(普天敎)의 새 도읍에서 큰 집들을 지었을 때, 높은 지붕 위에 서면 땅의 사람들이 개미같이 작아 보였다. 여느 와장은 현기증이 나서 감히 일을 할 수가 없어도 이옹 혼자는 땅 위에서와 같이 일을 치렀다. 일손을 잡으면 잡념은 가시고 무념무상, 기왓장에 모든 것이 집주(集注)된다. 그 대신 일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피로가 단숨에 밀어닥친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인사(海印寺)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며 우금 25년 전에, 그때만 해도 해인사와 가장 가까운 촌락인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마쟁이 마을에 비로소 정착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한 경각(經閣)과 나머지 당탑가람(堂塔伽藍) 등 수백 년을 두고 이끼 낀 기와이랑 가운데 이옹 손을 보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
지난번에도 66칸이나 되는 팔만대장경을 3명의 제자와 70명의 인부를 해인사로 내려가서 비 새는 데를 다시 손을 보아야 하겠는데, 하늘 밑구멍이 빠졌는지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역정을 부리기도 했다.
  

구름이 마을 밑에서 오가는 마쟁이 마을, 그것도 가장 높직한 초가집에 사는 이옹에게 기와 솜씰랑 어떻게 초가에 사느냐고 물으면,
“자고로 짚신쟁이 새 미투리 신지 못하고 갓쟁이 새 망건 못쓰는 것과 같은 이치랴.”
고 하면서 남의 돈도 많이 벌기는 했으나 도무지 ‘헌 체에 술 거르기’로 벌어들이는 족족 다 써버렸다고 뇌락(磊落)하게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옹의 독자(30세)는,
“아버님께서 연만하시지마는 지금도 기와일은 젊은 사람들이 따라서 못하리만큼 솜씨가 날래다. 언젠가 서울에서 궁전의 기와 올리는 것을 구경하시고는 그 사람들이 두덕 솜씨가 되어서 집을 버리더라고 몇 날을 두고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일에는 성미가 까다로워도 마음이 착하신 분이라 남의 어려운 것을 보면 수중의 것을 다 털어주고는 하니 당신 평생은 언젠 어려웠다.”
고 일러주었다. 조금도 아버지를 원망하는 기색이 업는 착한 말투였다. 이런 말들이 오간 초가집 처마끝에는 연신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딴도리가 없어 비가 오는 뜰에 잠시 이옹을 서게 하고 카메라를 겨낭질하면, 옹은 바람에 날리는 빈발(鬢髮)을 쓰다듬어 올리면서,
“보자, 자네가 서울 어느 관청에서 왔다고 했지?”
하고 혼자말처럼 되뇌는 것이었다.

(1961년 7월 15일)


사진1) 이우묵 사진
사진2) 통일신라 쌍조문암막새,조선시대 용문암막새,조선시대 초화문암막새
사진3) 해인사 대적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