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하고 발랄한 문양-청화백자 ‘망우대’명국화문접시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7-04    조회 : 4907
어렸을 때 어머님께서는 흰 모시나 옥양목에 빛을 낸다고 하셨다. 새 하얀 깁에 무슨 빛을 내시나 하고 의아해했지만 홍두깨에서 내려놓은 그 빛이 하도 맑고 청아하여 흰 데도 다시 빛이 나는구나 하고 감탄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눈같이 흰 데 맑은 윤이 나고 높푸른 가을 하늘이 투영되어 물든 것같이 희다 못해 아슴푸레 옅은 푸른 맛이 감돌고 있었다.
조선의 도자기는 백자가 기본이고 백자의 발색은 시대에 따라 그 맛이 조금씩 다르며,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백자의 발색은 철분과 불이 엮어내는 신비로움이며, 백자 유약 속에 함유된 미량의 철분이 환원작용으로 약간 푸른빛을 머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백자에 빛을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모시에 빛을 내는 것이나 백자에 빛을 내는 일은 흰빛을 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기술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기막힌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다운 흰빛을 가려낼 줄 아는 안목과 그 빛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심성이다.
  
흰 것은 물리적으로 모든 빛을 반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모든 예술활동의 기본 바탕으로, 흰 바탕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거울에 비춰 자기 모습을 보고 양심에 비춰 사리를 분간하듯 흰 것과 대조하여 여러 가지 색의 분별이 생긴다. 그것은 마치 호수의 물이 거울같이 고요한 상태이며, 개막 전의 정돈된 텅빈 무대이며, 태초의 공허함이다.
우리같이 흰빛을 기려 애정과 사랑을 경주하고 그 속에서 생활을 즐긴 백성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인의 은은하고 고요하며 청정한 마음의 자세이며, 거기서 무엇이든 창조해낼 수 있는 저력의 호수와 같은 것이다.
조선 초기의 백자 중에서 경기도 광주군 도마리, 무갑리, 번천리, 우산리, 오전리, 귀여리 등지에 있는 가마에서 번조한 것이 가장 우수하며, 또 그 가운데서도 환원이 잘되어 불이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잘 번조된 백자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잘 자고 일어나 방실 웃는 아기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욕탕에서 갓 나온 아름다운 여인의 피부라고나 헐까, 그냥 예쁜 것이 아니라 거기엔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이 있으면서 청신함이 깃들어 있다. 나도 도마리에서 원만한 왕사발 파편 하나를 주워 벌써 20년이나 넘게 책상 위에 놓고 늘 닦고 어루만지고 때로는 백자를 이해하는 분에게 보여드려 그 너그러운 백자의 마음을 함께 공감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가진다.
백자의 발색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가마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고, 또 같은 가마 안이라도 위치에 따라 다르며, 같은 그릇이라도 불길에 따라 그릇의 앞뒤가 다른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수많은 조선 초기의 백자 파편과 명품을 보았지만 이 청화백자 ‘망우대(忘憂臺)’명국화문(菊花紋)접시와 같이 백자의 피부가 아름답고 문양이 신선하고 발랄하며 간결하면서 곱고 예쁜 것은 본 일이 없다. 그 피부가 투명한 안개 같다고나 할까, 이른 새벽 정갈한 뒤뜰에 내린 포근한 함박눈이라고나 할까, 거기 연연한 푸른 맛은 있어 그 신선한 맛이 보는 이의 마음을 그렇게 즐겁게 할 수가 없다.
전이 있는 납작한 조그마한 접시이나 그 질감이 좋아서 큰 맛이 있고 코발트 발색의 작은 들국화는 거친 들가에 피어 어귀차면서 신선하다. 그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벌 한 마리가 그 위를 날고 있다. 들국화 두어 가지는 탐스럽지도 않고 호사스럽지도 아니하지만 가냘픈 듯 비바람과 추위를 이겨낸 강인하고 어귀한 줄기의 잎새에 조금은 고운 맛이 있으며, 왼쪽에 핀 맑은 두 송이꽃과 오른쪽에 더벅머리같이 생긴 막 피어오르는 좀 진한 세 송이 꽃에서 신선한 향기를 맡는다.
비스듬히 접시 위를 날고 있는 벌은 꽃의 향기와 신선한 꿀을 탐내고 있으며, 접시의 전에 있는 당초문을 간결하게 변형시킨 원과 점 문양은 들국화의 주위에 있는 들풀과 들꽃 들이리라. 접시 가운데는 약간 둥글게 패인 곳에 ‘망우대(忘憂臺)’라는 명문이 있다.
이 청화백자국화문(靑畫白磁菊花紋) 잔대에 예쁜 잔을 올려놓고 거기에 국화로 빚은 술을 한잔 따라 마셔, 온 세상의 근심을 훌훌 떨쳐버렸던 옛님네의 운치를 보는 것 같다.

※이 글은 <너그러움과 해학>(정양모, 학고재)에서 뽑아 실었습니다.
글을 쓴 정양모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이조도자>,<분청사기>,<백자>,<한국의 도자기>,<고려청자>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