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 해맞이-윤희순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6-22    조회 : 5130
좀체로 얻지 못하던 것을 얻는 때처럼 즐거운 것은 없다. 여행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있는 사람에게는 여행이 도리어 귀찮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즐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여행이 잦으면 경험이라든지 즐거움이 세련은 되겠지만, 여행 그것은 예사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일 년 내내 직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여행한다는 것부터가 큰 즐거움이다. 날마다 반복하던 생활형태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 벌써 청신미(淸新味)를 주는 것이겠지만, 그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러한 평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조한 일상생활에서 잠시라도 해방을 얻는다는 입체적인 것이다. 나날이 계속하는 생활이 반드시 나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회의 잡음은 신경을 말초적으로 날카롭게 하는 까닭에 안목(眼目)과 심법(心法)을 항상 국부적으로 집착하게 만들어 주고, 이러한 비대국성(非大局性)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핍박감(逼迫感)을 갑절 절실하게 걱정거리를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고민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환경의 탓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신경이 나를 옹졸한 생활권 내로 가둬 두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실로 이러한 집아상(執我相)에서 구해 주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는 새로운 풍경, 인정 모두가 심기를 일전케 하여 고뇌를 망각하게 한다. 견식을 넓힌다는 것도 있지만, 잠시라도 가족을 작별하고 친구를 떠나 멀리 타향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치 공중에 떠서 부감(俯瞰)하는 모양으로 나의 주위를 에워싼 세계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동네였던가, 그러나 얼마나 좁은 곳이었던가, 그리고 사랑스러운 가족들, 좋은 친구들, 그러나 왜 부질없이 미워하고 의심했던고-이건 향수적인 애정도 소생한다. 여행에서 얻은 감격과 교훈이, 여행을 좀체로 할 수 없는 경우에 있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이 여행을 동경하게 하는 박차가 된다.
  
이번 경주행도 이러한 일종의 소요심(逍遙心)을 가지고 떠났다. 물론 고도(古都)를 찾고 미술을 감상한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유적을 좆아 음미하자면 하루 이틀에 할 수도 없고, 또 미술을 고증하기에는 모든 준비가 충분치 못하였다. 차라리 토함 산상에서 동해의 해맞이를 하며 바닷바람에 마음을 씻고, 석굴암에서 고인의 위업을 추모하는 한 수도자가 되려 하였다. 이것은 나의 숙원이었으며 이번에 성취하였다. 서울서 곧장 부산을 돌아서 해운대의 해변에서 하룻밤 하루 낮을 쉬면서 몸의 때를 털고 유유한 마음으로 바닷가를 거닐었다. 일기는 쾌청인데 남국의 따뜻한 햇발은 백사장을 맨발로 밟기에 포근하도록 내리붓는다. 고요한 바닷가-잡답(雜沓:매우 분잡함)한 서울의 효설(曉雪:사납고 시끄러움)의 세계는 어느 곳이던가―먼 나라와 같다. 명상의 바다, 끝없이 유현하게 굽이치는 눌변(訥辯)의 물결, 바위보다도 무거운 물빛이다. 하늘 속으로 기어드는 수평선으로 마음을 달려도 보고 발을 돌려 백사에 묻힌 오색조개를 주우며 어린애같이 즐겨도 본다.
저녁때 불국사에 들러 일찍이 자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났다.
토함산 중턱에 이르니 동이 트기 시작하여 산등성이까지 뻗친 신작로의 굴곡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산등을 넘었을 때는 날은 밝았다. 석굴암을 멀리 바라볼 때에 나는 얼마간 실망하였다. 위대한 미술을 간직한 석굴로서의 면모가 없어 보였다. 고분같이 보이는 맨숭맨숭한 둔덕과 그림엽서 가게의 속된 유리창이며, 이런 것이 조금도 예술품을-동방의 걸작을 완상(玩賞)하는 지역의 분위기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것을 수축(修築)하기에 수년이 걸리고 십수만 원이 들었다지만 참으로 졸렬한 수장(修粧:손질하고 단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덕 아래에서 물을 마시고 손을 씻고 석굴로 들어선 뒤에는 이러한 불평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석가여래상 앞에서 잠시 저립명목(佇立冥目)하고 거룩한 고인들을 추상(追想)하였다. 반개(半開)한 두 눈에 얇은 광선이 서리어 마치 여래 자신의 미간에서 광채가 나오는 것 같다. 아마도 굴 바닥으로 스며드는 미명의 새벽 광선이 반사되었으리라.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입구 상부의 난간 틈으로 새어 들어온 광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대각견성(大覺見性)한 것도 정히 이맘때였으리라, 이맘때에 마침 서광이 두 눈을 비춘다는 것은 굴을 세울 때에 미리 짐작하였던가, 우연의 신비성이었던가. 아직도 모든 것이 새벽 속에 윤곽이 번져 있어 굴내의 명명(冥冥:아직 어둡고 고요한)한 그늘이 가시지 않은 속에서 자애 가득한 여래의 두 눈만이 먼저 환하게 보인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정경이다. 관음보살의 얼굴을 보면서 선덕공주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여래(如來)와 나한상(羅漢像)에서 신라시대의 표정을 찾아보았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웃는 얼굴은 무서운 모양을 하면서 얼마나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이냐. 여래의 팔에는 피가 돈다. 젖가슴에서는 살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관음의 팔, 손가락, 여래의 손가락,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고구려 벽화의 선보다는 훨씬 이상화된 선이다. 그리고 불국사와 더불어 고인들의 예지에 빛나는 구성적인 미감에 경탄하게 된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비단 옷주름 밑으로 두 다리와 젖가슴의 기복을 좇아 구슬꾸러미가 알알이 쏟아질 듯 흘러내리며 서리고 감겨 있어, 새벽 바람이라도 불어들면 금새 재그락 구슬 닥치는 소리가 날 것 같다. 육조(肉彫)의 입체감이 점점 도드라져 올라오기에 얼른 굴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해맞이를 하려는 것이다. 그때다. 새빨갛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이러한 형용사는 말할 수 없이 비속된 것이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부자유하고 졸(拙)한 표현이냐-붉은 해가 혓바닥 내밀 듯이 쑤욱 솟아 올라온다. 지구가 태양을 싸고 돈다는 말이 사실일지라도 아침해는 바다 저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정말 같다. 반 넘어 솟아오를 때이다. 해면(海面)과 접한 부분은 황금색으로 빛나며, 이때는 해가 바닷물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같이 보인다. 수평선에서 떨어졌을 때다. 해는 정원형(正圓形)으로 빛날 줄 알았더니 가로 퍼진 약간의 타원형으로 일그러지면서 꿈틀거린다. 이것은 해상의 수증기 까닭일까. 차차 올라올수록 이번에는 세로 가로 원의 윤곽이 부정형으로 꿈틀거린다. 움직이는 해! 그것은 끝까지 장엄한 광경이다. 황홀한 색(色)과 광(光)의 정채(精彩) 덩어리가 아니냐! 정열의 불덩이다.
어렸을 때 개성(開成) 만수산(萬壽山)에서 새벽 일찍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운해9雲海)를 보던 경이의 감명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지만, 그것은 하계(下界)를 덮은 구름 위의 고요한 꿈나라와 같은 유열(愉悅)의 감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해맞이는 생명력의 충일(充溢)에서 오는 숭엄한 감격이다. 이러한 장엄화려한 아침해의 감격을 안은 채 석굴암의 거장은 징과 망치질을 온종일 쉬지 않았으리라. 위대한 자연은 위대한 인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을 준다. 나는 이 해돋이의 감격 속에서 다시 석굴암의 여래상을 보고, 그리고 십일면관음보살을 보면서 자연과 예술과 인생의 혼연융합(渾然融合)된 순일(純一)의 경지에서 소요하였다.
자연은 실상 미라든지 신비라든지의 국한된 형용사를 가지고 말하기에는 너무 위대하다. 아침해가 장엄화려하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로운 해석일 뿐으로, 아침해 자신은 장엄한 체도 아니할 뿐 아니라 장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석굴암을 만든 거장이 현대의 미학자, 미술 연구가 등에게 찬사를 받기 위하여 돌을 쪼은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보다는 깨끗하고 거룩한 감격에서 필생(畢生)의 사업으로서 혼신(渾身)의 생명력을 바친 것이다. 자연에 대면 예술이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 그것도-사람이 자유로 해석하는 자연의 미라는 것도 자연의 본질과는 딴 것의 환상이 아니었던가. 하필 왜 불승(佛僧)을 만들었던가. 그것은 시대의 힘이다. 종교의 시대의 감격은 불상이 예술가의 가장 높은 제재였을 것이다. 만일 그 거장이 신라에 태어나지 않고 이탈리아에 태어났더라면 다비드를 만들었으리라. 혹은 비너스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면서 자연과 인생과 예술과 종교와-이런 것을 오직 감격과 흥분 속에서 뒤섞어 생각하여 보았다.


※이 글은 『조선미술사 연구』(윤희순 저, 열화당)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윤희순(尹喜淳, 1902-1947)은 서울 출생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로 호는 범이(凡以)이다. 1920년 휘문고보와 1923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주교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7년 제6회 「조선미전」에 <램프와 꽃><소년>이 입선하여 화단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조선미술의 당면문제」「조선미전의 모색성」등 다수의 미술 관련 논문과 비평문을 발표했다. 해방 후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 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서울신문사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미술사 연구』(1946)가 있고, 회화작품으로 <황의(黃衣)의 소녀>(1930)<모란>(1931)<휴식>(193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