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사(僧伽寺)의 두 고적(1)-근원 김용준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5-09    조회 : 5144
자하문(紫霞門) 밖을 나서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세검정(洗劍亭)이다. 승가사를 가려면 세검정에서도 십오 리쯤 올라가야 한다.
승가사 바로 뒷봉에 해마다 마멸해 간다는 진흥대왕(眞興大王)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찾아가는 길에 이삼십 년 전 앉아 놀던 세검정에 다다르니 정자는 간 곳이 없는데 예나 이제나 무심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주춧돌만이 외롭게 서 있다. 그 아담하던 정자는 벌써 삼사년 전에 불의의 화재를 만나 타 버렸다는 것이다.
허무하게 없어질 정자인 줄 알았다면 학생 시절에 파스텔로 사생해 둔 것이나마 고이 간직해 두었더라면 싶다.
옛날부터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곳이라 지금도 인가(人家)가 있는 데까지는 하얀 종이를 뜨는 것이 제법 볼 만하여 지루한 줄 모르게 걸음을 옮기게 한다. 절 어귀에 가기까지는 그다지 험로도 아니고 하루의 원족(遠足) 길로는 꼭 알맞은 곳이다.
  
절에 당도하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절 뒤 마애(磨崖)에 새긴 유명한 부조(浮彫) 석불이다.
사승(寺僧)에게 물으니 석불은 옛날 이곳에 몽고승(蒙古僧) 승가대사(僧伽大師)가 굴을 파고 수도를 하며 대사 손수 저 바위에다 부처님을 새겼다는데 절은 후에 창건된 것이라 한다. 일본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는 이 석불을 고려 초기 불상으로 잡고 고려 조각으로서는 신라 것에 비등할 만한 우수작이라 하였다.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이 마애불은 확실히 신라 조각에 틀림이 없다. 미목(眉目)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다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상모(相貌:얼굴의 생김새, 용모)는 턱이 꽉 받치고 원후(圓厚)하고 복스러운 맛이라든지, 의습(衣褶)과 가부좌(跏趺坐)의 자세며 팔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이 모두 다 신라의 감각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마애 전면이 바로 급한 낭떠러지로 되어 이십여 척이나 되는 높이를 조각하기에 여간 힘들 곳이 아닌데도 그 면상의 우미한 각법(刻法)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 아래의, 더구나 손의 각법은 대단히 소홀히 했다. 이 소홀히 한 것을 보아 고려 조각이라 속단하였는지 모르나, 경주 남산의 석불들도 하체를 소홀히 한 것이 적지 않으며 고려조 불상이란 은진미륵(恩津彌勒)을 보든지 마하연(摩訶衍)에 있는 마애불로 나옹조사(懶翁祖師)의 작이라고 이르는 묘길상부각(妙吉祥浮刻) 등을 보아도 그 면상의 졸렬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손으로 보더라도 이 조각과 비할 바 못 된다.
  

고려 불상의 대표격으로 치는 폐적조사(廢寂照寺) 철조여래상(鐵造如來像, 현 국립박물관 소장)을 필두로 한 다수의 고려불은 전체적으로 미목(眉目)과 구비(口鼻)가 모두 한 군데 모여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양편 볼이 빈약하고, 더구나 코는 짜부라지다시피 작고 가난하다. 귀도 신라불처럼 길고 넉넉하지 못하여 사람으로 치면 궁기(窮氣)가 든 얼굴처럼 촌스럽고 우울하고 오종종한 인상을 주는 것이 고려 불상의 특징이요, 각법의 스케일이 웅대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자꾸 둥글리는 데 여조(麗朝) 예술의 특징이 있어 이런 점에서 신라불과 그 감각을 달리하는 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다.

僧伽寺 在三角山 高麗李䫨 重修記有云 按崔致遠文集 昔有新羅狼跡寺僧秀台 飫聆大師之聖跡 選勝于三角山之南面 開岩作窟 刻石模形 大師道容 益照東土 國家如有乾坤之變 水旱之災 禱以禳之 無不立應  
승가사는 삼각산에 있다. 고려의 이오(李䫨)가 지은 『중수기(重修記)』에 이렇게 씌어 있다. 『최치원 문집』에 따르면, 옛날 신라의 낭적사(狼跡寺)스님 수태(秀台)가 승가대사의 위대한 행적을 실컷 듣고서 삼각산의 남쪽에서 승경지를 골라 바위굴을 파고 돌에다 대사의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도용(道容)이 우리나라에 더욱 빛나게되었다. 국가에서 커다란 변고가 생기거나 수재, 한발의 재앙이 있을 때 기도를 하면 즉각 영험이 있었다.

지금 이오의 『중수기』는 찾을 길이 없으나 『승람』의 이 대문을 보면 신라승 수태라는 사람이 승가대사의 위대한 행적을 많이 듣고 북한산, 지금 승가사 자리에 와서 굴을 파고 승가대사를 숭앙하는 나머지 그 상을 각(刻)하니 승가대사의 이름이 조선 땅에 더욱 빛났다는 뜻으로서, 이로 보면 신라의 수태란 승(僧)은 훌륭한 조각의 명수이었던 모양이고, 사승의 전한 바 승가가 이땅에 온 것이 아니라 수태가 바로 여기에서 수도한 것을 와전함이 분명하다.
  
승가란 중은 속성(俗姓)은 하(何)씨요 서성(西城)의 고승(高僧)으로서 서기로 628년에 나서 팔십삼 세나 산 사람으로, 삼십여 세 때 중국에 와서 당나라의 여러 제왕의 존숭(尊崇)을 받다가 서기 710년에 입적했는데, 세칭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란 말을 들은 만큼 여러 번 이적(異蹟)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국가에 불측(不測)의 변(變)이 있을 때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는 말과, 또 그의 전기에 당말 이후로 정사(精舍)를 조건(造建)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대사의 진상(眞相)을 만들어 세워 놓고 걸원(乞願)하면 효(效)를 얻는 수가 많다는 것 등을 보아, 이 마애불은 『최치원 문집』에 있는 말대로 추종한다면 석가상이라고 하기보다 확실히 승가의 상을 각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조각은 상모(相貌)나 법의(法衣)나 촉지항마인(觸地降魔印)의 좌세(坐勢)등 모두가 재래의 여래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니만큼 이상의 전제조건만 없으면 확실히 여래불상임에 틀림없다. 종래로 불상 이외의 한낱 수도승의 상을 이러한  스타일로 조각한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최치원 문집』에는 어찌하여 이러한 연유가 기록되었는가. 수태가 개암작굴(開岩作窟)하고 각석모형(刻石模形)하였다는 것은 틀림없이 이 조각을 말하는 것인 듯한데, 그렇다면 수태가 승가의 상을 각(刻)할 때 불상을 각조(刻造)하던 수법으로 그대로 각을 하고 만 것일까. 그러나 신라는 불교의 나라라 그만한 착오가 용허될 리 없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신라의 조각승 수태가 승가대사를 숭앙하여 삼각산, 지금 승가사 자리에다 터를 잡고 대사를 본받아 수도를 하면서 그 굴 부근에 석가의 상을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 조각은 누구를 각하였던지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한 개의 차디찬 석면을 통하여 천 수백 년이 훨씬 넘는 그 옛날 신라 조각수(彫刻手)의 정질과 흘린 땀으로 빚어진 신라 사람의 따뜻한 피를 느끼고 싶고, 그들의 느낀 미에 대한 감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모양으로 우리들의 정서를 흔들어 주는가 하는 것이다.

<새 근원수필>에서 뽑아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