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4-11    조회 : 4431
아는 분네 가운데 골동품 모으기를 좋아하여, 어쩌다 그런 댁에 가면 실컷 안복(眼福)을 누리는 수가 있다. 좋은 안주, 좋은 술에 얼마만큼 취흥이 도도해진 후 글씨나 그림, 아니면 도자기류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이다.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다관에 끓는 솔바람, 향기 높은 차(茶)를 머금고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도 술자리에서와는 또 다른 기쁨이다.
글씨나 그림 또는 도자기들은 거개가 값진 것이 되어서 스스로가 지니는 예술적인 가치 외에도 엄청난 돈값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니 자연 잘 꾸려서 오동으로 만든 상자나 함에 깊이 간직하여 신주 위하듯 한다. 혹시나 찢어질세라 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것을 볼 때 형편이 거꾸로 되어 내가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나와 같은 소심하고 속된 주제로는 좋아하는 끼쁨보다는 주체를 못하는 마음의 부담이 더할 것 같다. 또 박물관이나 개인 수장가들의 좋은 것만 잔뜩 보아서, 혼기를 놓친 노처녀처럼 눈만 높아가지고 웬만한 것은 눈에 차질 않고, 좋다 싶은 것은 값이 엄청나 아예 갖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는 것은 잘한 노릇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무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아침저녁 몸 가까이에 두고 실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그저 몇 점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필통을 들 수가 있다.
  
재래의 필통은 분원(分院)에서 구워낸 백자필통(白磁筆筒)으로써 잘 된 것은 지금 수만 금을 하는 것도 있고, 아무렇게나 대를 잘라서 만든 것에는 푼돈으로 구해지는 것도 있어서 돈값으로 따지면 천층만층이 되겠고, 그 종류나 생김새도 천차만별이겠지만 필통은 한결같이 지난날 선비들이 아끼고 위하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이 보배로치던 것은 금이나 옥이 아니고 종이, 붓, 먹 들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긴한 붓을 담았던 필통은 소중히 알았을 것인즉 그 소중함은 오늘날 골동품적인 가치와는 또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요는 자랑삼아 여기 내세우려는 필통은 이른바 골동품으로서의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퍽 아끼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필통은 잡목의 둥근 토막을 잘라 만든 것이다. 통 둘이 하나로 붙었는데 키가 한쪽은 조금 크고 한쪽은 작다. 한 뼘은 될 나무를 속은 둥글게 파고 겉은 가볍게 모를 내었다. 불규칙하게 여러 모를 내었으나 둘레가 원에 가까운 것은 필통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모나지 않았던 탓일지 모른다. 가장 위 언저리는 가볍게 밖으로 젖혀져, 피어나려는 꽃송이의 그것에다 비길 수가 있다. 낮고 높은 것이 쌍으로 붙었는데 원목(原木)이 굽은 것이 되어서 밑과 위만 대못을 써서 붙였을 뿐 가운데는 나무가 굽은 만큼 사이가 떴다. 그  좁은 공간은 빽빽한 숲 새에서 우러러보는 조각 하늘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키가 작은 쪽 필통 몸 앞뒤에 새겨진 그림이다. 앞쪽에는 성긴 소나무가 엉성히 가지를 뻗었는데 그 아래로 수꿩이 막 날아올라가는 모습이요, 그 반대쪽에는 잡목 숲 새에서 웅크리고 있는 까투리 한 마리를 새겼다.
  
둔한 촉 끝으로 긁어서 그린 듯한 양은 어수룩하고 꾸밈이 없어 정이 간다. 치졸하기가 헤아릴 수 없는데 조잡스럽지 않아 좋다. 겉은 옻칠을 하였고, 옻칠은 오랜 세월에 절어 발갛게 익었다. 필통의 됨됨이로 보아서 익숙한 장인의 솜씨는 아니고 어느 시골 선비가 글을 하던 여가에 파적삼아 서투른 솜씨로 공들여 만든 듯하다.
만들어놓고 보니 아무래도 서투르고 밋밋하여 여기(餘技)로 하는 문인화의 솜씨라도 살려 앞뒤에 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옻칠은 그의 노부모들의 관재(棺材)를 위해서 집에 마련했던 것을 조금 찍어서 발랐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갓방에라도 가서 갓장이한테 발라 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책상머리에서 지치면, 나는 숭굴숭굴 아무렇게나 생긴 필통을 쳐다보며 이렇게 내 마음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