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기행>>중 <옥산(玉山)>편-박종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3-21    조회 : 4297
(1767년) 12월 7일 우리 선생님은 서울로 떠나시는데 바로 아화길로 드시고 나는 이민숙과 함께 오른쪽으로 돌아 옥산을 보기로 하고 이튿날 자인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오십 리를 가서 옥산 동구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물어 해가 가고 있다. 송림이 울창하여 그윽한 맛을 풍긴다. 숲을 지나 한굽이를 돌아드니 얼음에 덮인 용소가 있고, 좌우의 바위는 천연으로 대소를 이루어 기이하기만 하다. 얼음이 이지러진 데를 들여다보니 용소의 깊이가 한 길은 되겠으며 물이 새파랗게 맑디 맑아 벽옥과 같다. 계곡으로 백여 보쯤 걸어가니 수석이 더욱 기이하고 누각이 즐비하니 물어보지 않아도 여기가 옥산 서원임을 알 수 있다.
시내를 따라 수십 보 들어가니 시내의 흐르는 골이 온통 하나의 반석으로 되어 있다. 바위가 떨어져서는 대가 되고, 꺼져서는 소가 되었으며 그리고 그 떨어진 데와 꺼진 데가 모두 먹줄을 치고 따낸 것 같다. 소의 깊이는 알 수 없고 물빛은 푸르니 무슨 신물이 있는가도 싶다. 서쪽 석벽에는 용소라는 두 글자를 새겼고 석대 외면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이는 퇴도의 글씨이다.
  
무변루에 오르니 방 안에 독서하는 제생들이 있다. 한 소년이 나와서 자기는 인동 사는 사람으로 추천을 받아 여기 와서 공부한다고 하다. 누의 안마당에는 두 서재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암수재(暗修齋)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민구재(敏求齋)이다. 그리고 서재 위쪽에는 구인당(求仁堂)이 있는데 왼쪽 방에는 양진재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오른쪽 방에는 해립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또 구인당의 북쪽에는 사당이 있어 체인사(體仁祠)라는 현판이 붙었다. 대개 현판을 다 한호의 글씨이다. 나는 사당 뜰에 들어서서 첨앓고 당에 올라가서 위판(位版)을 살펴보니 ‘문원공 회재 선생’이라고 씌어 있고 성자는 씌어 있지 않은 것이 의심스럽다.
사당 앞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기고봉이 그 비문을 짓고 이산해가 썼으며 아래에 씌어 있는 소기(小記)는 박소립이 지은 것이다. 나는 묘비가 서원에 서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내가 방에 들어 서재의 책들도 보고 서원의 기록들을 뒤적이고 있을 때 인동 소년이 또 와서 신공 택성과 칠곡의 유선생(달해)이 독락당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전해 주었다. 내가 경주 관아에 있을 때 이미 선생의 손자인 성표, 희성 두 사람과 함께 선생의 구택(舊宅)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져서야 독락당에 이르니(서원에서 한 마장 올라간다)유선생이 나를 위하여 일부러 문 밖까지 나와서 웃으시며 맞이하셨다. 잠계의 후손 십여 명도 다 와서 만났다.
  
독락당 뒤 십보쯤에 양진암이 있다. 이는 시내에 가까이 있어 남쪽 문 위에 걸린 현판은 계당이라 하였고 동쪽 문 위에 걸린 현판은 인지헌이라 하였다. 인지헌은 대에 가까이 있고 대 아래는 못이 있어서 흘러오는 물소리가 도란거리다가 못을 만나자 멈칫하고는 못을 지나서야 또 소리를 낸다. 오른쪽엔 관어대가 있고 왼쪽엔 영귀대가 있는데 석층이 반듯반듯 방정하여 칼로 벤 것 같다. 대개 계곡의 이 한 굽이는 서원 앞보다 더 정갈하면서 좁다. 시내를 따라 수십 보를 올라가서 탁영대를 구경할 때에는 날이 벌써 어두웠다. 언덕 위에 정혜사가 있어서 중에게 횃불을 들고 안내하게 하여 정심대에 이르렀다. 이곳을 모두 선생이 이름짓고 거닐던 곳으로서 선생의 유적을 하나하나 가르키니 선생의 지혜에 접한 듯하다. 사자암이 멀지 않게 상류에 있다 하나 밤이라 컴컴하여 가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대개 산이 깊어 호랑이를 꺼리기 때문이다.
  
정혜사에 들어갔더니 문설주에 선생이 쓴 ‘횡거육유서(橫渠六有書)’란 필적이 있다. 이는 선생이 글을 읽을 때 우연히 쓴 것인데 중이 이를 새겨서 전하게 된 것이다.
유선생과 천천히 시내로 내려올 때 중 몇 사람이 횃불을 들고 따라 왔다.
주인이 나를 위하여 베푼 저녁은 매우 후하였다. 식후에 달빛을 따라 시내에 있는 정자로 나와서 다시 거닐면서 사면을 바라보니 층층이 높이 솟아 앞에 선 것은 화개산이라 하고 뚜렷이 자리잡고 뒤에 앉아 있는 것은 도덕산이라 하는데 계류가 그 사이를 흐르고 있다. 시내에 도착하니 정자가 있고 바위가 군데군데 천연의 대를 이루었으며 솔그림자, 참대 그늘은 서로 어우러지고 움직이던 모든 것이 쉬고 있는데 오직 물소리만은 맑게 울고 있다. 밤이 깊도록 난간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기니 고인 정신이 언 시내와 찬 달빛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닭이 몇 번 우는 새벽녘에야 독락당에 돌아와 잤다.
옛날에는 독락당의 동헌에 방 하나가 있어 선생이 어머님을 그곳에 모시고 새벽마다 저녁마다 살피고 인사드려 효성이 지극하였다 하나, 지금은 옛 기둥이 그냥 있을 뿐이다. 뒤뜰에는 두어 이랑 애본(艾本)이 있는데 이것도 선생이 강화에서 옮겨온 것이며 계정의 좌우에 있는 솔과 참대들도 대개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데 자손들이 보호하여 왔으므로 이백여년이 지나도록 모두 죽지 않았다. 선생의 구경연의 초본, 서간 글씨 및 퇴계 선생이 쓴 원조 오잠(元朝五箴) 등을 구경하니 두 선생의 풍모를 우러러 접하는 듯하였다.
주인이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주면서 서로 잊지 말라고 하니 이 또한 감격스럽다. 잠계 선생 자는 전인(全仁)으로 서자였었는데 지금 이 옛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 그의 후손이다. 그의 장손은 지금 양좌동에 산다고 한다.
내일이면 떠날 테니 이곳 풍경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선생이 심은 오죽 몇 대를 얻어가지고 돌아가서 아끼고 보살필 작정을 하였다.

*박종(1735-1793) 의 <<동경기행>>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