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실록>> 중 <초의선사와의 인연> -소치 허련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3-03-16    조회 : 5026
객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다른 법문(法門)과 연계(緣契)를 맺었거니와 초의라는 선사(禪師) 한 분이 있었지요. 그 선사는 듣건대 고승이었다고 합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공(丁公)에게서 내전(內傳)을 배웠으며 허다히 사대부들과 종유하였다고 합니다. 그 선사는 호남팔고(湖南八高)에 들어 있으며 조정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합니다. 스님으로서의 범행이 고고하여 중인들과 함께 지내지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선사는 외따로 초가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적었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여 초의 선사와 정결한 인연을 맺었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바로 그 노장(老長)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소시 적에 내가 초의(草衣) 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孤苦)하고 담적(淡寂)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에 나는 대둔사(大屯寺)에 있는 한산전(寒山殿)으로 들어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선사는 나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고 곧 방을 빌려 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년 동안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서로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초의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頭輪山)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것에 두어간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리면서, 뜰 복판에 파 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다(茶) 절구를 마련해 두고 있었습니다. 초의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의 달이
훤하게 담그어지고,
낚싯대 드리우니 까마득히
구름 샘에 통하도다.

또 이런 시도 있습니다.

눈을 가리는 꽂가지를 꺾으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았던가.
  
  



 
 
 
 
 
 
 
 
 
 
 
 

 
 
 
 
 

 
 
 
 
 
이와 같은 시구(詩句)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초의 선사의 그 청고(淸高)하고 담아(淡雅)한 경지는 세속인들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양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선사는 고요에 잠긴 채 시를 읊으면서 흥얼거렸습니다. 향불을 피워 향기가 은은히 퍼질 때에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 스스로 취흥에 젖어들곤 했습니다. 정적에 잠긴 작은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들과 상대하고,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손님이 찾아올까 두려워 슬며시 숨어 버리기도 했었습니다. 초암(草庵)에 있는 선사(禪師)의 서가(書架)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蓮花)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法書)와 명화(名畵)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經)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초의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物慾) 밖의 고상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마는,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도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초의노장(草衣老長)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초의선사께서는 어느 날 《심경(心經)》 비전(秘傳) 한 권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해와 시(時)를 가리키는 천간(天干) 두 글자를 취하여 사람의 한평생을 알게 하니 이른바 운명을 헤아리는 문자이네.」 내가 그 책을 받아 펼쳐보니 자기조(鎡基條:인품을 말하는 조목)가 나왔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옥기(玉器)는 모름지기 먼저 다듬고 갈아야 하며, 진금(眞金)은 수백 번 연마하여 공을 들여야 하리라. 남의 힘을 빌어 하늘의 궁궐에 올라가 고개를 들고, 여러 신선들이 대라(大羅)에 오름을 보리라.」
또 그 책 행장조(行藏條: 출입을 말하는 조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조화(造化)가 사람의 손으로 행하여지는 것을 안다면, 대낮에 용을 타고 옥경(玉京)에 올라가리라, 귀인의 도움으로 힘을 입으니, 영화와 부귀가 날로 높아지리라」
나는 그 대 이 두 조목의 말이 허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내가 두루 경험하고 난 후에, 비로소 그 말이 아주 정확히 부합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계축년(1835)간에 내가 다시 초의선사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하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초의선사께서는 지난 날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대 소치(小癡)가 상감(憲宗)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은,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도와주신 덕택일 것이네. 내가 비구(比丘)로서 새로운 불전(佛殿)을 경영하였는데 그때는 아직 초암(草庵)에 있을 당시였네. 나는 준제불(准提佛)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는데 일심이 온통 정(定)의 경지에 들어갔었네. 그랬는데 하루는 뜻밖에 그대 소치 군이 찾아와서 재(齋)를 드리겠다고 청했었지. 나는 그때 사양하지 않고 온 정성을 기울여 재를 올렸었네. 그 뒤에 그대 소치가 서울에 올라가 명성이 매우 자자하게 되었으니 어찌 불조(佛祖)께서 암암리에 도와 주시지 않았겠는가?」나는 그 말을 듣고 두 손을 모으고 감탄하여 「제가 그렇게 된 게 다 까닭이 있었군요」하고 말했습니다. 초의 선사는 새로운 불전(佛殿)의 공사를 끝내고 일로향실(一爐香室)로 옮겨서, 노년을 보내시다가 입적(入寂)하였습니다.
선사의 의발(衣鉢)은 수제자 서암(恕菴) 선기(善機)가 받았는데 지금은 진불암(眞佛庵)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작년 7월에 나는 李松坡공과 함께 초의선사의 종상(終祥)의 재(齋)를 올리는 곳에 가서 곡(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