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처님-예용해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12-14    조회 : 2941
  
내 책상머리 서가 위에 자그마한 부처님이 놓여 있다. 한 자쯤 되는 이 석불은 내가 책상머리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를 굽어본다. 이 부처님을 모시게 된 지도 이제는 5,6년이 되었다.
셋집을 전전하다가 그래도 남의 집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늦은 가을, 주택영단이 지은 교외 흙벽돌집에 들었다. 언덕받이에 지어진 집은 울도 담도 없어, 처음엔 사방 이웃과 그대로 통하기 마련이었다. 집들이 다식판으로 찍어낸 듯하여, 눈썰미가 남과 같지 못한 데다 밤이 늦기가 일쑤인 나는 흔히 아닌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곤 했다.
한겨울이 지나 눈바람이 자고, 봄에 들면서부터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끼리 서로 시샘이나 하듯 뜰을 가꾸고 부엌을 뜯어고치고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시멘트 블록으로, 그만 못한 집들은 판자로 제가끔 울타리들을 막았다. 100여 호의 새 동리가 집집마다 목수와 미장이를 불러 뚱땅거리니 가위 봄 한때는 동네가 새 기운으로 흥성한 듯했다.
우리집은 다음해 가을에 들어서도 울타리를 못했다. 행인은 집안을 그대로 들여다보기 마련이요, 집안에서는 방에 앉아 길 가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으니,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살림일망정 가히 천객만래(千客萬來)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양상의 군자는 울타리를 막은 집에 찾아들기는 했어도 우리집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아침저녁 집집을 훓다시피 하는 걸인들도 자주 찾아들기를 사양하는 눈치였으니 세상인심이란 묘한 것이라고 느끼기도 하였다.
안빈(安貧)이 쉬운 것도 아니며, 또 자랑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런 일과는 관련이 없이 가난하기가 일쑤로 가난을 느끼기에 둔한 나로서도 겨울 하늬바람이 바람막이가 될 울타리 하나 없는 허전한 창에 휘몰아치는 밤에는 서글픈 마음이 새삼 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글퍼질 때마다 우리처럼 울타리를 못하는 길 하나 건너 맞은편 언덕받이 집의 같은 처지를 두고 자위를 하곤 했다.
그 집에는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와 손자 되는 대학생과 식모살이를 하는 파파할머니 하여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침울한 얼굴이었고, 손자인 대학생은 할아버지에 대해 고분고분한 것 같지가 않았다. 내왕이 없어 그 집안의 깊은 사정을 알지는 못하나 서로 환히 들여다보며 마주 살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짐작으로 알게 되었다. 소문인즉 별거하는 할아버지의 아들 되는 사람이 부자라고도 했고, 그런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부자라고들 수군댔으나 그런 것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끔 아침 일찍 집 앞길을 쓸고 있으면 그 할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높은 석축 끝에 나와 서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 건네는 법도 없었고 아는 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처지는 처음 이사를 올 때나 한 1년을 이웃해 살고 난 다음이나 매마찬가지였다. 그러던 하루, 이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울타리가 없으니, 문을 열라 할 까닭도 없이 그대로 뜰에 들어서서는 좀 보자는 것이었다.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동저고리차림으로 그날 아침따라 안개가 자욱한 뜰에 서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인사였다. 두 손으로는 자그마한 돌부처님을 소중히 안고 있었고 깊은 주름으로 덮인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잔뜩 찌푸린 그대로였다.
어디로 옮긴다는 말도 없이 대뜸 이 부처님을 모심직하니 두고 가겠다고 덥석 안겨주는 것이다. 손에 받아든 자그마한, 그러나 제법 묵직한 돌부처님의 따뜻한 촉감은 뜻밖이었다. 할아버지가 안고 있는 동안에, 그 체온이 까맣고 반질반질한 돌바탕에 오랜 세월의 때가 오른 부처님에게로 옮은 모양이다.
그날 돌아와 보았더니 할아버지는 어디론지 이사를 가버렸고 다음날부터는 새로 든 사람들이 울타리를 서둘러 하룻만에 막아버렸다.
  
나와 나의 돌부처님과의 연분은 이와 같이하여 지금부터 6,7년 전에 어설피 맺어진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독실한 신심을 지녔던 품에서 자라났다고는 하나 나로서는 부처님이 생겼다고 하여 당장에 불단을 마련하고, 아침저녁 예불을 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름도 성도 모를 이웃 할아버지가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 부처님을 안겨준 것도 불연(佛緣)의 소이라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일인즉, 남에게 주거나 하는 일이 없이 책들을 쌓아둔 벽장 속에 그대로 놓아둔 채 무심한 몇 해가 지났다.
그러던 것이 가끔 집에 들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우연히 벽장 속의 부처님을 보고는 '벽장 속에다 부처님을 모시다니 될 말이냐'고 못마땅해했다. 하긴 그것도 그럴 듯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서가 바닥에 그대로 모셨다가 부피가 있는 연감 한 권을 깔고 그 위에 모셔놓으니 한결 돋보이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그러하려니와 이 돌부처님과도 그 뒤부터는 아침저녁 얼굴을 마주하는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 누가 백팔염주를 갖다주었을 때도 고마웠고, 가끔 들르는 선학원(禪學院) 일초(一超) 스님이 향을 갖다주었을 때도 그러했다. 염주는 좀체 매만지게 되지 않았으나 향이 생겼을 때는 곧 자그마한 놋향로 하나를 사서 부처님 앞에 놓고 생각나면 한두 가치 향을 피우곤 했다.
중국향은 진하고, 일본 것은 가볍고, 우리나라 것은 순하고 소박타 한다. 불가의 말로는 향이 부처님께 큰 공양이 된다는 것인데 부처님도 부처님이려니와 마음이라도 스산하고 할 땐 내게도 큰 공양이 되는 듯싶었다.
공양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의 부처님은 이렇다 할 공양을 받지 못한다. 뜰에 꽃이 있을 때는 한두 송이 꺾어 병에 꽂아두기도 하고 가끔 향을 피우는 정도가 고작이다. 지난번에는 시골집에서 인편에 보내온 곶감을 어린것들이랑 둘러앉아 먹다 말고, 부처님 생각이 나서 네 살 난 민아에게 부처님께도 드리라고 했더니 한 입 베어먹던 것이랑 해서 곶감 서너 개를 부처님 앞에 드렸다. 그러나 그마저 저녁에 와보니 깨끗이 없어졌다. '부처님은 곶감 먹을 줄 몰라.' 곶감을 먹어치운 민아의 말이다.
이렇듯 공양을 거르고 때로는 먹다 만 곶감을 갖다바쳐도 나의 부처님의 풍협한 면상에는 고졸한 웃음이 여전하다. 내 잘잘못일랑 탓하지 않고 언제나 정안정시(正眼正視), 결가부좌한 채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부처님의 모습을 대하노라면 때로는 아쉬운 하소도 하게 된다.
'부처님 결코 제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친구가 잘못입니다. 화가 나서 어떻게 견디지요.'
'부처님 이렇게 쓸쓸하고 이렇게 허전할 수가 있습니까.'
공양도 제대로 못 올리는 주제에 아집에 차서 보채기만 하는 이 마음 가난한 중생 앞에서도 코끝이 좀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보관(寶冠)이며, 전신에 흐르는 섬려한 옷무늬가 아름다운 부처님은 마냥 대자대비,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하고 너그럽기만 하다.
더러는 스님을 불러 개안식을 올리고 원불(願佛)로서 제대로 모시라는 권이 있기도 하였으나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 등상불로 비단 위에 모셔 올리는 날이면 아침저녁 이렇게 가까이 버릇없는 대화를 할 수가 없게 될 것이고 또 나의 부처님도 그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석조 관음보살 좌상 / 고려시대 / 예용해 기증

이 부처님은 필자인 예용해 선생님의 기증으로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