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병연행록>>중 ''천주당을 보다''-홍대용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11-23    조회 : 3469
  

초9일 천주당을 보다

이 날 바람이 크게 일어 길에 먼지가 하늘을 덮었고 눈을 뜰 길이 없어 풍안경(風眼鏡 : 바람과 티끌을 막기 위해 쓰는 안경)을 내어 끼고 갔다. 정양문 안을 지나 서쪽 성 밑으로 수리를 가서 멀리서 바라보니 2층 성문이 티끌 가운데 표연(飄然)히 높았는데, 이것이 선무문(宣武門)이다. 이 문 안으로 마루 없는 높은 집이 공중에 쌓여 있고, 기와 이은 제도와 집 위에 세운 기물이 다 그림에서도 보지 못하던 모양이어서 묻지 않아도 천주당인 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큰 문을 들어가니 서쪽으로 또 문이 있는데, 이것은 안으로 통하는 문이다. 동쪽에 벽돌로 담을 정결히 쌓고 가운데 문 하나를 내었는데, 반만 열려 있어 문 밖의 첩첩한 집들이 은은히 비치었다. 세팔을 불러 그곳을 물으니 세팔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진짜 문이 아니라 담에 그림을 그려 구경하는 사람에게 재주를 보이려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두어 걸음을 나아가보니, 과연 담에 그린 그림이고 진짜 문이 아니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서양국의 그림 재주를 상상할 수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첩첩한 집이 있고, 뜰을 건너 두어 층 돌계단을 올라 남향한 큰 집으로 들어가니,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는 정당(正堂)이었다.
  
북쪽의 주벽을 의지하여 네모진 병풍 한 척(隻)을 쳤는데, 수묵으로 산수를 기이하게 그렸고, 그 앞으로 탁자 하나를 놓았다. 그 제양은 연잎 모양이었고, 옻칠 위에 이금(泥金 : 아교풀에 갠 금빛가루)으로 화초를 그렸다. 외다리를 세우고 그 아래에 네 굽을 달았는데, 모두 새김과 채색이 이상하였다. 탁자 좌우로 세 쌍의 교의를 놓고 교의 앞으로 조그만 그릇에 등겨(왕겨)를 가득히 담아 각각 놓았는데, 이것은 침을 뱉게 한 것이다. 좌우 바람벽에 산수와 화초를 그렸고 또 인물을 가득히 그렸는데 다 진짜 형상이었으며 공중에 드러나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면 종시 그림인 줄을 믿지 못할 듯하였다. 사람의 생기(生氣)와 안정(眼睛 : 눈동자)이 완연히 산 사람의 거동이어서 차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듯하였고, 높은 바위에 폭포가 내리는 모양은 의연히 소리를 들으며 옷이 젓는 듯하였다. 또 성 위에 외로운 내(川)와 수풀 가운데 층층한 누각이 아무리 보아도 벽 위에 진짜 경계를 베푼 듯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주당은 유명한 곳이어서 한 번 구경하고자 하는데, 사람을 불러 인도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유송령이 말하기를,
'어찌 사람을 시키겠습니까? 내가 같이 가겠습니다.'
하고, 즉시 일어나 뒷문으로 인도하였다. 따라서 들어가니 뒤에 또한 뜰이 넓고 뜰 가로 온갖 화초분을 놓았으며, 서쪽으로 꺾어 수십 칸 행각(行閣)이 있어 칸칸이 비단 발을 드리웠으니, 사람들이 머무는 곳인가 싶었다. 화초분은 빈 것이 많았고 뜰에 열 개 정도 흙무덤이 있으니, 이는 화초를 묻는 곳인가 싶었다. 동쪽 처마 밑을 돌아 북으로 꺾어 두 번 문을 드니, 이곳이 천주를 위한 묘당이다. 그 안이 남북으로 열칸 정도였고, 동서는 5, 6칸이었으며 높이는 7, 8장(丈)이었다. 네 벽과 반자를 다 벽돌로 만들고 나무 한 가지 드린 곳이 없었으니, 먼저 그 이상한 제도를 짐작할 것이었다.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畵像)을 그렸는데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 하는 사람이다.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 있는 모양이고,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두는 장) 같아, 처음 볼 때는 소상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을 알았다. 안정(眼睛 : 눈동자)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畵格 : 화법)이었다.
  
동서 벽에 각각 열 명 정도의 화상을 그렸는데, 다 머리털을 드리우고 장삼(長衫: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옷) 같은 긴 옷을 입었으니, 이것은 서양국의 의복 제도인가 싶었다. 화상 위로 각각 칭호를 썼는데, 다 서양 사람 중에 천주학문을 숭상하고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이마두(利瑪竇 : Matteo Ricci)와 탕약망(湯若望 : Adam Schall) 두 사람밖에는 알지 못하였다. 천주화상(天主畵像) 아래로 10여 쌍의 꽃을 꽂은 병과 온갖 기이한 기물을 벌여놓았는데, 다 서양국의 화기(花器)이고 기묘한 제양이어서 이루 기록하지 못할 것이었다. 두어 칸을 물려 한가운데 높은 탁자를 놓고 그 위에 향로와 향합과 온갖 보배로운 집물을 벌여놓았으며, 한편에 아로새긴 책상을 놓고 그 위에 누런 비단보를 덮었다. 유송령이 그 보를 헤치고 한 권 책을 내어 말하기를, '이것을 보십시오'하기에 나아가 보니, 다 황제와 후비(后妃)의 복록(福祿)을 축원하는 말이다. 유송령이 비록 나이가 많고 천문·역상(曆象)에 소견이 높았으나, 이런 무리(無理)하고 아첨〔阿黨〕하는 일을 스스로 낮추어 외국 사람에게 자랑하고자 하니, 극히 비루(鄙陋 : 고상하지 못하고 더러움)하고 용속(庸俗)하여 먼나라 이적(夷狄 : 오랑캐)의 풍습을 벗지 못한 일이다. 양쪽 바람벽의 위층에는 다 화상이었고 아래층에는 온갖 누각과 인물을 그렸는데, 채색과 기물이 천연(天然)하고 이상할 뿐 아니라, 두어 칸을 물러서면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 인물의 정신을 알 길이 없었다......

* 이 글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쓴 『을병연행록』 중 일부이다. 『을병연행록』은  1765년(35세)부터 1766년까지의 북경 여행기이며 당대에 한글로 씌어진 흔치 않은 기행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