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최순우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11-03    조회 : 3698
  
좋은 공예작품일수록 그 아름다움의 본성이 건강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예가 건강하다는 말은 구조가 착실하고 그 용도에 따라 주어진 기능이 쓸모있다는 뜻이 될 것이며 정직하다는 뜻은 공예작품의 장식의장이나 색채에 허식과 잔재주가 없고 따라서 아첨할 줄 모르는 공예 본질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조시대 서민의 일상생활에 쓰여지던 공예, 그 중에서도 문방(文房)과 내실(內室)의 가구들 그리고 소도구들이나 식기류·제기류 같은 공예 작품들을 살펴보면 목·칠·금속공예를 가릴 것 없이 바로 이러한 건강과 정직의 아름다움이 신기로울 만큼 멋지게 발로된 경우가 많다. 의식적인 아름다움이었건 무의식적인 손맛이었건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싹이 터서 수천 년간 민족의 이름으로 그 생활 속에서 세련되어온 한국미의 가장 구체적인 결정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아름다움의 본성은 오늘의 한국미의 밑바탕이요 또 오늘을 앞지르는 한국미의 샘터라고 생각해야 옳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활미의 조촐한 터전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지조의 아름다움과 학문화를 살펴볼 때 그리고 천박하고 무성실한 오늘날 날림 공예품의 추악한 꼴을 대할 때 우선 우리는 이조 공예품에서 보여준 이조 공장(工匠)들의 양심과 성실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삼국, 신라의 금공(金工)·도예(陶藝), 고려의 청자문화 같은 썩지 않은 공예품은 아직도 옛 무덤 속에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더 길이 살아있어서 먼 훗날의 후손들의 손으로 거두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조 목죽공예품(木竹工藝品)들이 19세기말부터 불어닥친 문명 개화의 회오리 속에서 얼마나 무분별하고도 가혹한 운명에 처했었는가를 회상해 보면 이제 얼마 안남은 이조 명품들의 장래를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썩어서 사라지고 바다를 건너서 사라지는 과거 한국미의 결정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살아온 이조 생활문화의 증징물(證徵物)들은 지금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도 없으며 이대로 가면 이 아름다운 샘터는 멀지 않아 메마를 운명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의 장롱이나 문갑 그리고 작은 서안의 예를 보더라도 이조의 공장(工匠)들은 거의 공리(功利)를 떠난 일을 하고 있었다. 쓸모에 따라 각기 다른 재목(材木)을 켜서 여러 해 동안 그늘에 말려두고 적재적소주의(適材適所主義)를 지켜왔으며 목공품의 사괴물림이나 이음새 풀칠이나 닦음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끊임없는 공기(功技)의 연마 속에서 전통의 존엄함을 묵수(墨守)하면서 자신의 창의를 살렸고 또 그것이 자리잡을 건물이나 주위와의 조화에 방심하지 않았다. 먹감나무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검은 목리문(木理紋)을 대담하게 가구 정면 장식으로 이끌어 들인 창의라든가 거멍쇠장식의 소박한 맛을 곁들여서 한층의 단순미를 추구한 의장 등은 현대의 서구적인 좋은 공예의장이 지향하는 간소미와 직결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의당 이것을 근대 감각이라고 불러서 어색할 것이 없는 이조적(李朝的) 표현애(表現愛)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낱 이조시대의 반상(飯床)에 불과했던 소반이 오늘날 국내외에서 매우 넓은 폭으로 애호가가 번져나가고 있는 것도 결코 이국정서나 호고(好古)취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소반 자체가 보여주는 이러한 본성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주반이니 통영반이니 해주반이니 해서 각 지방적인 풍토색을 농후하게 깃들였으면서도 행자(杏子)판이니 괴목(槐木)판이니 피나무판이니 하는 재료자체를 매우 분별해서 썼었다. 또 소반이 용도와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분수에 맞게 설계된 番床이니 두레반이니 하는 분별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집단개성, 말하자면 한국인의 성정이 하루이틀에 바뀌어질 도리도 없고 한국인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의 성정과 같아질 수도 없는 일이며 또 같아져서도 세상은 재미가 없어질 것이다.
한국 호랑이의 어질고도 호탕스러운 성품이 아프리카범의 야성과도 달라서 각기의 체도와 아름다움을 분별해 지니는 자연의 무궁무진한 넓이를 보여주듯이
  
한국의 주택과 생활문화가 과거 것이라 해서 덮어놓고 그 기반을 떠나서 양식(洋式)이나 일식(日式)을 충실하게 본따라야만 할 논리는 설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늘의 현실을 앞질러 전진해야 할 현대 한국 공예의 중흥을 위해서 이조 공예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성실한 이조 공기(工技)의 현대적 해석이 오늘처럼 다급하게 절감될 때는 또 없었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 먹감나무 삼층탁자 / 서안 / 대나무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