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쌍계사 화엄사 편-정시한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9-30    조회 : 2727
17일 아침에 비가 약간 내리고 흐렸다.

아침 식사 후에 전휘선사와 함께 먼저 영주각(瀛洲閣), 봉내전(蓬내殿), 청학루(靑鶴樓)를 보고 동쪽에 위치한 법당 앞에 이르르니 진감국사의 비가 있었다. 최고운(崔孤雲)이 지어서 직접쓴 전서(篆書)가 새겨진 비석이었는데 화재(火災)에 손상되어서 머지 않아 부서지고 말 것만 같아 애석한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어루만지며 감상에 젖어 있다가 법당을 보니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새로 실시한 단청와 금벽이 휘황찬란하였다.
  
나한전(羅漢殿)을 지나서 영당(影堂)에 이르러 최고운의 영정을 보니 사모를 쓰고 홍포를 입은데다 신을 벗고 기대어 앉아 있으며 모난 얼굴에 듬성듬성한 수염이 흡사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각국사와 10여명의 조사(祖師)의 영정이 나열되어 되어 걸려 있었다. 한동안 구경하다가 빈 누각으로 돌아왔다. 노승 의윤(義允)의 나이는 82세 였으며, 해민(海敏)은 무진생(戊辰生)이었는데 이 절의 연혁(沿革)과 고적(古跡)에 대하여 물었더니 일일이 말해 주었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찬휘와 해민 두 승려와 쌍계를 가서 보았다. 옥헌(玉軒)노장이 2,3리를 따라와서 쌍계에 도착하니 큰돌이 좌우에 문처럼 마주 서있었다. 길이 그사이로 나있는데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란 큰 글자가 쓰여져 있고 오른쪽에는 쌍계(雙溪)란 큰 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글자 획이 마치 살아 있는 용이 날아서 움직이는 듯하고 이끼가 끼지 않아 새로 써 놓은 듯하였으며 또 전각한 흔적도 없었다. 날아 내리는 폭포수와 깊은 못이 맑아서 구경할만하였으므로 두어번을 배회하면서 날이 저무는데도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21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절에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아침 식사후에 옥철(玉哲), 변훈(辯訓), 삼훈(三訓) 및 두어 명의 승려들와 함께 나한전(羅漢殿)과 시왕전(十王殿) 등을 두루 보고 이어서 장육불전(丈六佛殿)의 터를 보니 반듯하고 넓었으며 석각(石刻)인 법화경판(法華經板)을 장육불전 터의 뒷편 비어 있는 집에다 쌓아 놓았다. 또 부도암(浮屠菴)으로 올라가 세워 놓은 부도를 보니, 기묘하여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이 사찰은 연기(煙起) 조사가 창건한 절이며, 부도는 곧 석가(釋迦)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므로 조사(祖師)의 석상(石像)은 탑 앞에 다 두고 여인상(女人像)은 탑 아래에 두어 정중하게 이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승려가 하는 말이 여인은 곧 일명 선각(禪覺) 조사의 어머니 상이라고 하였고, 장육불전(丈六佛殿)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절터가 넓고 큰 것과 석축을 높이 쌓아 놓은 것과 석탑이 높고 큰 것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던 것들이었다. 절을 화엄사(華嚴寺)라고 한 것은 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늦게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남원(南原) 상동면(上東面) 운계원(雲桂院)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수성현(水星峴)을 넘어 저물녘에 응양역(應良驛) 마을에 도착하여 역리인 박백운(朴白雲)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대략 70리를 행하였다. 길에서 태익(太益) 종장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광삼(廣森) 법사 때 쌍계사(雙溪寺) 소은암(小隱菴)에 있던 자였다. 말에서 내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작별하였다.

정시헌(1625∼1707)의《산중일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1. 왼) 쌍계사 입구의 '쌍계명' 바위  오) 쌍계사 진감선사비
도2. 위) 화엄사 각황전     아래) 장육전의 화엄석경
도3. 화엄사사사자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