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청평사편-정시한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9-23    조회 : 2665
정묘년(1687) 8월 7일, 맑음.

아침에 안개가 짙어 읍내로부터 주위의 형세를 볼 수 없다가 소양정(昭陽亭)에 이르니 안개가 자못 걷혔다. 정자에 올라 한참 동안 주위를 조망하니, 등 뒤로는 첩첩한 산봉우리와 층암 절벽이 둘러싸 깊고 그윽하고 아래로는 맑은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큰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먼산이 둘러 서 있어 경치가 천태만상이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나루를 건너 10여 리를 가니, 강가에 성대한 마을이 있길래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심승지(沈承旨) 광수(光粹)의 장원(庄園)이라 하였다.
  
작은 재를 넘어가니 또 큰 들판이 있었고, 강을 따라 10여 리를 가니 큰 마을에 큰 집이 있었는데 바로 강릉군수(江陵郡守) 이후(李煦)의 집이었다. 제방 길로 가는데 길이 매우 위험하여 말에서 내려 도보로 5리쯤 가서 청평동(淸平洞) 입구에 들어서니,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시에 이른바 "산골짜기는 비좁고 강물은 구비 도는데 가파른 길 기울고. 홀연히 구름 속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시내에 놀라라.[峽束江盤棧道傾 忽驚雲外出溪淸] "이란 구절이 바로 이 곳을 두고 읊은 것이다. 누차 시냇물을 건너니 들어 갈수록 더욱 지세가 깊었다.
시냇가에서 잠시 동안 점심을 먹고 말에게 풀을 먹인 다음 길을 재촉하여 청평사(淸平寺) 아래 구송정(九松亭)에 이르니, 영지(影池)가 있었고 산문 밖에 이르니 돌 섬돌 위에 진락공중수청평기(眞樂公重修淸平記)가 있었는데, 고려 김부식(金富軾)이 짓고 승려 탄연(坦然)이 쓴 것이다. 승려들은 매우 적고 절도 퇴락하여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승 영우(靈祐)가 문 앞을 바라보고 있기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가 두채의 법당을 구경한 다음 서쪽 해랑으로 내려와 상좌(上座) 갑성(甲成)과 함께 선동(仙洞)의 식암(息菴)으로 올라가니, 수좌승(首座僧) 청오(淸悟)가 홀로 앉아 있다가 맞아주었는데, 나이는 정축생이고 기운과 용모가 자못 청수하였다.
  
그와 송대(松臺) 위에 앉아 산중의 고적(古跡)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어 진락공[고려 이자현(李資玄)]의 유골이 묻힌 곳에서 출현한 지석(誌石)을 보았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다 해독할 수는 없었고 첫 부분에는 공의 휘(諱)가 적혀 있었다. 유골이 사리함(舍利函)에 들어 있어 사람들마다 꺼내 보았는데, 청오가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려 하기에 내가 그만 두게 하였더니, 그가 이르길 '오늘 아침에 한 상좌가 손으로 몇 조각 뼈를 꺼내어 보길래 그도 같이 보았더니 조금도 썩은 빛이 없고 희고 깨끗하기가 새 것과 같더라'고 하였다. 지석 두 장과 사리함을 함께 돌틈 속에 넣어 두고 있는데, 왕래하는 감사(監司)나 병사(兵使), 수령(守令)들이 혹 사리함을 꺼내라고 명하여 앉아서 구경한다 한다. 언제부터 이러한 해괴한 일이 있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현(前賢)의 유골을 거두어 안장하는 이가 없어 설만(褻慢)히 대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니, 너무나 놀라운 마음에 애도하고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아래에는 모당(茅堂)의 터가 있고, 그 곁에는 폭포가 흐르고 반석과 우뚝 선 바위가 있었는데, 반석을 파서 위 아래로 두 함지박을 만들어 위의 함지박에는 손을 씻고 아래 함지박에는 발을 씻는다니 기교(奇巧)하여 천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송대 위에 방석을 놓고 늘 앉아서 쉬는 곳으로 삼는다 한다. 모당의 터는 그윽하고 폭포는 맑게 흐르며 섬돌은 반듯하여 완연히 새로 만든 것 같았다. 이렇게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마치 진락공과 더불어 바위 벼랑과 푸른 나무 사이를 거니는 것만 같아 처연히 감회가 일었다.
저녘에 노복(奴僕) 수리(搜理)가 이부자리를 가지도 왔길래 돌려보내고 청오와 함께 잤다. 청오는 불법(佛法)에 자못 조예가 깊어 그 공부에 능통하였다. 이 날은 50여 리를 갔다.

정시헌(1625∼1707)의《산중일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 1. 청평계곡
도 2. 왼상) 청평사 회전문  왼하) 청평사 영지
       오) 청평사 삼층석탑
도 3. 구성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