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인물형 토기와 말의 피 -존 카터 코벨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9-15    조회 : 4259
'한국미술 5천년전'의 대표적인 상징품 가운데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관과 단단한 회색토기로 제작된 신라 기마인물형(騎馬人物形) 토기를 둔다. 섬세하고 화려한 금세공품을 내세우는 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토기를 앞장세운 것은 뜻밖의 일로 여겨져 눈이 갔다. 국보 91호로서, 이 예사롭지 않은 말 모양의 토기 사진은 국립 박물관에서 파는 엽서로만 수천 장이 팔려 나가는 등 매우 낯익은 유물이다.
  
예술사학자로서 나는 당연히 이 특이한 토기가 무엇에 쓰였던 것인가가 궁금하다. 이 토기는 1920년대에 경주고분에서 발굴되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이에 대한 설명은 고작 '토기, 술잔으로 쓰인 듯'이란 게 전부였다.
5세기에서 6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아직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무속신앙을 가진 나라였다. 왕들의 무덤에는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데 필요하리라고 여겨진 갖가지 물건들이 하나 가득 부장돼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고분에서는 금관, 금제 허리띠, 칼, 기타 장신구와 함께 300여개나 되는 토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기마인물형 토기는 이제까지 단 2종만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받침대 달린 토기가 일상용 그릇이라면 기마인물형 토기는 특별한 용도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신라인들, 적어도 상류층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을 통해볼 때 굉장한 애주가였나 보다. 가지각색으로 빚어진 술잔은 말머리 받침의 각배(角杯)에서부터 배 모양 받침의 각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다.
이런 부장품은 가야고분이나 경주고분이나 거의 같다. 아주 기념비적인 의례의 술잔으로 사용됐던 듯한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형 토기를 비롯해 말 모양을 본뜬 토기들이 얼마나 많이 발굴됐는지는 주목해봐야 한다. 말모양 토기가 매우 풍부하게 출토됐는데도 공식적인 설명은 고작 '토기의 정확한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어서 답답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이 예사롭지 않은 모양새의 수많은 이형(異形)토기를 두고 1500년 전 한국인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기능을 추리해보는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하나씩 분석해보기로 하자.
말 모양을 한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 앞가슴에 나 있는 주둥이의 위치다.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이다. 술이든 물이든 혹은 말의 피 같은 것이든, 토기 안을 채운 액체는 말 가슴의 대롱 같은 주둥이를 통해 흘러나오게(혹은 마시게) 했을 것이다. 말의 꼬리가 부자연스런 각도로 뻗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손잡이로 조정된 것이 분명하다.
초기 시베리아 무속에서 말의 종교적 중요성을 파고들어가 본다면 그 결말은 실로 압도적인 것이다. 어떤 무속 의례에서는 말을 제물로 바쳐 죽은 뒤 의례의 하나로 그 피를 받아 마시는 과정이 있다. 사람들이 제물인 말을 잡아 그 피를 그릇에 받으면 의례를 집전하는 샤먼 혹은 가장 중요한 위치의 누군가가 의식의 하나로 그 피를 마셨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예술가가 말 앞가슴에 칼 같은 주둥이를 달고 있는 이 기마인물형 토기보다 더 의미심장한 상징물을 만들 수 있겠는가?
동부여족들은 한반도 중부로 내려와 가야지역에 살았다. 나중에 백제가 이 일대를 쳤을 때 패주한 가야인들은 신라로 와서 고대 신라인들에게 여러 가지 기술을 전승했던 것 같다. 말모양의 토기가 가야와 신라 두 지역에서 같이 발견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말은 샤먼을 하늘로 태워간다고 여겨졌던 만큼 기마인물형 토기를 화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비록 전체는 아니더라도 말뼈를 부수어 토기흙에 섞어 반죽한 사실이 밝혀질는지도 모른다. 이 같은 예는 경주 155호 고분 천마총에서도 나타났다. 무속의 신성 우주수목인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각각 다른 8장의 천마도가 나왔던 것이다. 독자들은 시베리아 무속에서 중요한 말의 존재가 한반도 남부 신라에까지 이어져왔음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에서는 건조된 말뼈에 주술적인 힘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신라의 진골(眞骨), 성골(聖骨) 등의 골품(骨品)제도가 여기서 유래됐다고 하면 지나친 것인가? 이 흥미로운 주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논하겠다. 지금은 이상한 말 형상에 날카로운 주둥이가 박혀 있는 토기 술잔이 주제이다.
역사 초기 사람들은 생활 전반이 신통력으로 좌지우지된다고 믿었다. 사회적 행태도 심리적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사후세계를 염두해 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을 잘 모셔야 그 혼이 산 사람에게 해코지를 아니한다고 생각했다. 지배자인 왕은 사후에도 그가 쓰게 될 일용품들을 무덤 속에 잘 갖쳐놓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뒤에 살아남은 백성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죽은 왕을 잘 돌봐주는 데 달려 있는 셈이었다. 금광이 발견되자 비용을 아끼지 않고 온갖 종교적 상징을 담은 아름다운 금관을 만들었다.
이제 독자는 말의 피를 다루는 의례가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초자연적인 힘은 매우 현실적으로 생활 전반에 작용했다. 생전에 말을 제물로 잡아 올려 그 피를 마셨다면(시베리아 지방에서 해오던 것처럼) 신라의 샤먼왕은 사후에도 상징적으로나마 말의 피를 들이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1924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 기마인물형 토기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식민지 한반도에서 발굴을 담당한 것은 일본인 고고학자들이었는데 '기마민족'은 그들에게 생소한 것이다. 1945년 한국이 독립하고도 북쪽 절반이 가로막히는 바람에 가야와 신라의 묘제 주인공인 기마민족을 추적해 연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난제가 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무속을 연구해보면 수많은 부족마다 말과 관련된 의례를 치렀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말을 성스러운 존재로 여겼으며 흰 말의 경우는 더 극진했다. 모든 부족마다 신성 우주수목을 지니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그들이 매우 좋아했던 나무이다. 155호 천마총에서 나온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장니)의 존재는 1500년 전 신라 사람들에게도 천마와 함께 자작나무 역시 성스러운 것이었음을 확신케 했다. 샤먼은 현대 무당들이 입는 옷과 모호하게나마 비슷한 구석이 있는 옷들을 걸쳤다.
이처럼 누적된 증거에도 불구하고 왜 박물관이나 문화재관리국의 관계자들은 미국 내 8곳의 박물관에 순회전시됐던 기마인물형 토기의 내부를 검증해보려 들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과학기술연구소(KIST) 같은 데서 토기 내부의 밑바닥과 양옆을 조금 긁어내 화학적으로 분석해본다면…….과연 피의 흔적이 입증될 것인지? 혹시 말피가 분명할는지? 그렇다면 이 기마인물형 토기의 용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술잔이 아니라 고대의 무속의례에서 희생된 말의 피를 담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이 토기가 화학적인 분석결과 술잔이었다 해도 흥미롭겠지만 더 나아가 말의 피를 담아들였다면 보다 진지한 호기심을 유발할 것이 틀림었다.  

존 카터 코벨의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