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탑의 건축공법- 존 카터 코벨
글쓴이 : 관리자     첨부파일 :       날짜 : 02-09-08    조회 : 3633
한국에서 가장 높은 황룡사 9층탑은 645년 경건한 불교도였던 신라 선덕여왕대에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보면 이 탑이 80.18m 높이의 9층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80m라면 엄청난 높이인데, 최근의 황룡사지 발굴에서 가로 세로 8줄의 주춧돌 64개와 심초석 1개가 발굴되어 탑의 한 변이 23.5m에 달했음을 확인했다. 일본에서 이에 필적할 어떤 기록도 찾아낼 수 없는 만큼 황룡사는 이로써 가장 큐모가 컸던 절임에 틀림없다. 거의 동시대 일본 호류지에 세우진 5층탑은 32.45m 높이에 한 변의 길이는 7.5m를 하고 있다.
  

황룡사는 여러 번 화재를 당했는데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손에 파괴되고 난 뒤에는 재건축되지 못했다. 다행히 호류지는 670년의 화재 이후 재건축되어 이제까지 전해져온다. 호류지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장인들이 대거 일본의 두뇌로 유입되면서 건축된 절이었다. 호류지 건축을 담당한 예술가와 건축가, 장인들이 백제인들이었고 신라를 위해 황룡사를 건축한 것도 백제인들이었기에 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호류지의 5층 목탑 건축 양식은 전통적인 백제 양식에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 호류지 부근의 호린지(法輪寺) 탑과 호키지(法起寺) 탑은 호류지보다 낮은 3층탑이지만 역시 동일한 백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야심만만한 탑 건축의 시작은 우선 산에 들어가서 목재로 다듬었을 때 높이 30m가 넘는 크고 튼튼하고 곧게 뻗은 재목감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호류지의 목재 심주(心柱, 탑 한가운데 박는 기둥)는 땅 속에 3m 깊이로 박혀 있는 만큼 원래 재목은 40m 이상의 큰 나무였을 것이다(그 당시에 어떻게 그 큰 통나무를 절터까지 운반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40m의 큰 나무를 통째로 어떻게 다뤘을지 추측할 수 밖에 알 수 없던 터에 하물며 황룡사의 심주감인 76cm 높이의 통나무에 있어서랴? 도대체 그걸 어떻게 가눌 수 있었을까? 호류지 탑의 기본 공법은 중심에 박은 심주 주의에 마치 우산살이 펴지듯 가로보를 엮은 것이었다. 탑의 각 측을 둘러싼 벽체(壁體)는 들보를 지탱하는 내력벽이 아니라 병풍처럼 둘러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방식은 캔틸레버(Cantilever, 한쪽 끝이 고정되도 다른 끝이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보)공법으로 처마를 대담하게 내뻗치게 했다.
나로선 전문 건축가가 아니니 80.18m의 황룡사 9층탑을 어떻게 목재만을 써서 건축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측천무후가 낙양성에 지은 91m짜리 명당 건물이 철주를 심으로 박아 지었졌던 사실은 신라 황룡사 9층탑이 어떻게 지어졌을지에 대한 참고 사항이 된다. 명당은 쇠심주를 박아 안에서는 3층이고 밖에서는 9층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중국 목재는 한국 목재처럼 강한 재질이 못 되었다. 중국의 대궐과 절 건물에 뻘건색 진사(眞砂) 단청을 입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산 목재는 중국 것보다 훨씬 품질이 좋은데도 건축가들이 당나라 풍습을 모방해 궁궐과 절에 붉은 칠을 올렸다.
  

그 동안 발굴된 5세기 금관 등에서 증명된 것처럼, 탁월한 금속 장인이 많았던 신라로서 나무 2개를 철이나 청동과 같은 금속으로 연결시켜 원하는 대로 60m가 넘는 대들보감 목재를 얻지 않았을까? 《삼국유사》에는 9층탑이 완전히 목재만을 써서 건축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무를 금속으로 연결 시키는 것을 배제하는 말은 아니라고 본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룡사지는 고고학자들의 수년간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심초석을 비롯해 66개의 화강암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조유전 발굴단장은 그림을 보여주며 황룡사 9층탑의 사방 크기는 한 변이 23.5m로 밝혀졌음을 설명한다. 이는 호류지 5층탑의 한 변 7.5m에 비해 1층의 길이가 3배 가까이 되는 것이다. 80.18m 높이를 받치는 밑변의 비율로서 타당한 치수인 것이다.
688년 측천무후가 낙양에 세웠던 명당은 695년에 불타 없어졌는데 이후 중국은 다시는 그런 높은 목조탑을 시도하지 않았다. 처음 지을 때 많은 스캔들이 따랐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 역시 후세에 남겨지지 못했다. 중국에서 아직도 전해오는 전탑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이 건축된 것이다.
  
전(塼)을 사용한 건축은 한국에서 초기 불교 시대이외에는 거의 도외시되었고 일본에서는 전혀 유입되지 않았다. 목재로는 하늘로 쳐들린 처마의 곡선을 낼 수 있었지만 벽돌은 그런 미학을 발휘하기가 불가능한 때문이었다. 또한 벽돌 전은 전체가 단단한 한 덩어리로 뭉치기 때문에 내부 장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도외시된 이유였다.
한반도에서 화강암 석탑에 앞서 세워졌던 목탑들은 모두 전란과 벼락 등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세워진 석탑들이 한국탑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한반도 곳곳에 말 그대로 수백 기의 석탑이 여러 번의 보수를 거치고도 꿋꿋이 서있으면서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땅에는 한때 목탑도 이만큼 많았을 것이고 그것들은 대단히 아름다웠을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존 카터 코벨의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1) 황룡사9층목탑지
도2) 법주사 팔상전 내부와 쌍봉사 대웅전
도3) 경주 남산 탑곡 사방불암의 구층탑